MYARTS

  • 작가명 : 위영일,  레진, 가죽, 모터, 센서, LED램프 130x120x15cm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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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정체성과 허영의 공통점은 순간적이고 만져서 느껴질 수 없으며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정체성은 헛되기에 우리는 정체성을 사회적 허영의 양태로 파악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감당할 수 없기에 자기 자신을 솔직히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 하는 우리들 모두의 다양한 환상을 조명하여, 자존심으로 어두워진 욕망의 환상을 스스로의 덧없음을 드리워내는 현대적 일상의 단편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고자 한다.
우리는 선택된 사람이 아니다. 보행자들과 우연히 관계를 맺는 사람들일 뿐이다. 무대가 있는 실내 공간이 아닌, 관객과 경계가 없는 관계를 설정한다. 장르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다양한 예술적 가치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 창작활동을 지원한다.
연례적으로 찾아오는 과거의 망령들 문명사회와 문화는 발전한 것 같은데 불현듯 찾아오는 주기적인 역사 콤플렉스들 스포츠경기가 시작되면 우리는 경건히 국가에 대한 ‘충성’을 암묵적으로 다짐하고 전 국민이 하나 되어 광폭적인 ‘스포츠민족주의’를 넘어 ‘쇼비즘’에 빠지며 스포츠의 순수성보다는 승부에 만 과도한 집착을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선수는 사라지고 전사들로 그 자리를 메우었고 국민배우 안성기를 필두로 요즘은 툭하면 국민여동생, 남동생이 생겨났으며 ‘사회의 다양성’이라는 구호와 대척점을 향하여 우리의 정신들은 하나가 되어 뭉쳐진다. 이견이 통용되지 않는 사회, 열등감으로 점철 된 역사, 이것은 실재공간을 넘어 가상공간에서 더 쉽게 보여 지고 편향되고 있다. 게시물을 향하여 쏟아지는 맹목을 즐기는 무리들을 보면서 나는 이것들을 ‘주체로의 욕망’의 과정 속에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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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평론
글. 유경희

이 세상에는 아름다움이 마치 기체와도 같이 널리 퍼지고 확산되는 반면, 예술작품은 점점 더 소멸되어 간다. (이브 미쇼) 미술가가 된다는 것은 미술의 본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며, 모든 미술은 개념적으로만 존재한다. (조셉 코수스) 한 사람의 현대 미술가에게 경탄할만한 점은 작품의 다양성이 아니라 그 일관성일 것이다. 그들은 과거에 제작되었던 것과는 다르게 보이고 거의 닮지 않은 것들을 만들고 있지만, 자신의 작업 내에서는 유사성에 근간한 반복, 즉 자기동일성의 메커니즘에 매몰된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작가들은 자신들이 창조한(개발에 가까운) 조형언어를 평생동안 천착하는 놀라운 의지를 보여준다. 예술은 마치 자기만의 조형언어를 누구보다 빨리 특허로 등록하기 위해 새로운 발명품을 만드는 것과 같은 실용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어떤 작가는 평생 물방울만을 그리고, 어떤 작가는 일생 한지를 접고 있으며, 어떤 작가는 계속 돌을 채집하고 그것을 전시장에 늘어놓는가 하면, 어떤 작가는 평생 건물과 강과 바다와 대지를 포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소위 ‘물방울 작가’ ‘닥지 작가’ ‘벽돌 작가’ ‘포장 작가’라는 명예스러운(?) 닉네임을 얻으며, 그것이 마치 미술계에서 획득해야할 보증수표라도 되는 듯 의기양양하게 미술계에 안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낡은 물신숭배가 사라진 뒤에 새로운 물신숭배가 들어선 것처럼, 오늘의 예술가들은 여전히 형식을 창조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으며, 그것은 마치 자기애와 자동기술 그리고 자기증식, 자기복제, 자기분열, 자기모방과 같은 자기동일성에 근간한 작업으로 반복되어 가시화되고 있다. 도대체 지금 이 순간, 예술의 독창성이란 무엇이며 예술의 자율성이란 무엇인가 대한 질문이 새삼스럽게 제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술가는 왜 자신이 창조한 스타일과 기법과 같은 형식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왜 그것을 고유하고 절대적이고 근본적이며 불변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지속적으로 자신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는 일에 실패하는 것일까? 한 작가의 동일한 조형언어가 평생동안 지속되고, 그것이 미술시장에 오랫동안 존속하는 것을 비단 후기자본주의적 미술계- 특히 화랑, 미술관, 미술시장, 저널리즘 등- 의 공모로만 돌릴 수 있는 것일까? 그것보다 더욱 원초적으로 예술가의 양심과 자유 그리고 예술의 본질에 관한 화두를 다시 던져보아야 하는 시점은 아닌가? 비록 비평가 아서 단토(Arthur C. Danto)가 예술이 숭고함과 같은 초월적인 가치들을 명상할 기회를 거의 주지 않는 세속화되고 특수성을 상실한 이 시대에, 아무도 예술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지 않으며, 어쩌면 현대미술에서 예술의 본질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기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유니크(unique)한 작업으로 보여주는 한 작가가 있다.
포스트-모던 패러디, 독창성의 문제
위영일의 일련의 작업은 언뜻, 미술이란 형식을 창조하는 것이라는 형식주의 미술에 대한 반기와 저항처럼 보인다는 측면에서 모더니즘류의 미술에 대한 문제제기로 느껴진다. 왜냐하면 인용되는 대부분이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과 색채 그리고 매체(재료/도구)와 같은 형식적 특성을 견지한 작가들의 유니트(unit)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딱히 모더니즘류의 형식주의 미술에 대한 비판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조류에 상관없는 현대미술의 광범위한 작가군이 포함된다고 하는 편이 옳다. <그들의 칼라>는 파레트 위에 서양의 유명작가들의 최소한의 조형언어 즉 유니트가 방금 짜낸 물감처럼 깔끔하게 배열되어 있다. 굳이 이름을 적지 않더라도 누구라도 알만한 유명작가들의 작품의 유니트 -이브 클랭의 파랑, 프랑크 스텔라의 등고선,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흐린 영상, 크리스토의 포장, 리히텐슈타인의 만화화적인 선과 망점, 사이 톰블리의 낙서 등 - 가 등장한다.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미술의 색채, 기법, 매체, 스타일과 같은 형식들이 여전히 한 작가를 특징짓는 존재론적 얼굴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더군다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듯이 미술도 또 다른 미술을 참조할 수밖에 없다는 맥락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결국 미술사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이와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 는 작가들의 형식과 매체에서 가져온 유니트들을 마치 미술재료 칼라 차트처럼 구성하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마치 특허를 등록하듯 조형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한 예술가의 의무이자 그의 신화를 만들어내는 첫 번째 관문이자 관건이 되고 있다는 공공연한 사실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위영일의 연작 중에는 마치 칠판 위의 분필그림처럼, 혹은 자연사 박물관의 인스트럭션처럼 미술 도구의 역사를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파악한 작품이 있다. 이는 도구적 욕망을 가진 인간이 새로운 도구를 발명함으로써 진화를 거듭해 왔듯이 예술 또한 도구의 진화에 연동하여 변화를 지속해왔음을 보여준다. 한편 예술가가 사용하는 도구만으로 작품의 형식과 매체를 역추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적인 상상력을 환기하기도 한다. 특히 작가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만한 를 통해 리차드 롱(Richad Long)의 설치작업을 비판함으로써 현대미술 전반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를 재치있게 들추어내고 있다. 돌을 유니트로 원을 구성하는 1987년의 설치작업과 2004년의 국제화랑에서의 설치작업은 누가 봐도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영일은 이 두 설치작업 사진 옆에 조형상의 유사성을 이용하여 ‘안티프라민’ 사진을 나란히 배치한다. 작가는 한국에서 타박상의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진, 1933년부터 지금까지 대중에게 유통되고 있는 ‘안티프라민’을 배치하여, 현지에서 얻은 돌과 나뭇가지 등으로 동심원이나 둥근 모양의 띠를 만드는 일을 수 십 년 반복하고 있는 리처드 롱의 작업을 한껏 조롱한다. 이렇듯 작가는 자기 조형언어를 탄생시킨 후 그것으로 수 십 년을 일관되게 -작가 말대로 ‘영원히’- 재탕(?)하는 예술가들의 틀에 박힌 상투성과 전형성과 안일함을 냉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각적인 유사성에 입각한, 대중적으로 친근한 특정 상품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는 위영일의 알레고리적 방법론은 특유의 아이러니와 위트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이처럼 외형적으로는 미술가들의 생산품과 생산방식에 대한 도큐멘트이자 작품의 도구와 매체와 같은 형식과 기법을 통한 진화의 유형학에 관한 위영일의 작품은 결국 현대미술가들의 작품에 대한 독창성을 의문시하는 데 이르고 있다. 주지하듯 그의 이러한 비판의 배경에는 다원주의와 해체주의를 모토로 삼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와서도, 예술가가 매체와 형식 그 자체에 매몰되는 습성, 그 고유성을 신조화하는 일관적인 태도, 자신만의 절대적 양식의 창조와 예술의 순수성에 집착하는 태도가 여전히 존속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는 어쩌면 미술이 시각적인 것을 거부하던 시기조차도 여전히 시각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미술적 ‘표현’이란 결국 그 매체와 형식에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의 탈신성화 혹은 예술가의 탈신비화
위영일의 작품은 일종의 미술적 독서이자 비평적 텍스트로 자리매김 된다. 그는 미술의, 미술을 위한, 미술에 의한 미술을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작품은 미술의 자기비판과 자기성찰 즉 자기지시성과 자기참조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모더니즘 미술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지만, 형식을 창조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는 예술을 위한 예술지상주의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등 모더니즘적인 미술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이다. 더욱이 그가 기존 작가들의 형식과 매체 속에서 끄집어낸 독특한 유니트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포스트모던 패러디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위영일의 작품은 그 차용되는 작가의 작품들이 세심한 선별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즉 임의적으로 선정되고 배열된다는 점에서 좀더 정교하고 치밀한 분석적 태도가 요구된다. 그러니까 확고한 개념이 중요한 그의 작업에서 차용되는 대상에 대한 특정적 범주화 -예컨대 모노크롬, 하이퍼리얼리즘, 색면추상, 하드에지로 구분하여 세부적 비판을 행한다는지 하는- 가 좀더 수사학적이고 언어학적으로 정치(精緻)해질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위영일은 미술에 대한 내재적 자기 비판을 감행하기 위해 예술을 이상적인 것으로부터 실제 세상으로 끌어내렸다. 즉 작품이 어떻게 직조되고 구성되는지를 미시적으로 분석하게 되면, 예술가의 작업은 마치 현미경으로 본 듯 탈신비적으로 해체되어, 아우라가 상실되기에 이른다. 이로써 작가는 예술작품을 재규정할 것을 요구하며, 예술을 다시 심판대에 세울 것을 요청한다. 소위 예술작품의 신성화에 대하여, 예술 표현의 위기에 대해서, 창조적 작업으로서의 예술의 본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듯, 그것은 작게는 유통되고 소비되는 자본주의적 상품으로서의 미술에 대한 비판이자 미술관과 화랑과 저널리즘의 공모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예술가의 자유와 예술의 신화에 대한 전면적인 철학적 성찰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위영일은 예술가들에게 조형언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술의 본질에 대한 화두를 자신을 비롯한 동시대 작가들에게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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