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ARTS
  • 번호 : 1
  • 클로드 모네
  • 등록일 : 2012.11.22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 Claude Oscar Monet

1840년 11월 14일 ~ 1926년12월5일


 





오스카 클로드 모네는 파리 라피트 가에서 식료품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네가 아주 어렸을때 모네의 가족은 해변 근처의 르아브르로 이사했다. 어릴적 모네는 캐리커처를 그리는 솜씨가 뛰어나 10~20프랑씩 받고 팔기도 했다. 그지역의 화가였던 외젠 부댕은 모네의 캐리커처를 보고 재능을 알아차려 야회에 그림을 그리러 나갈때 모네를 데리고 나가기도 했다.
그 당시 야외에서 유화를 그리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모네는 훗날 `부댕 덕분에 나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아버지에게 그림 공부를 하러 파리로 가겠다고 말했다.` 고 회상했다.
19세때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스위스에 들어갔다. 이후 2년간 병역을 치르고 1862년 파리로 돌아왔다.
1865년 모네는 열아홉살인 카미유 동시외를 만났는데 당시 카미유는 모네가 가장 좋아하는 모델이었고, 나중에 모네의 애인이 되었다. 모네의 아버지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아 경제적 지원마저 끊었다. 이 무렵 모네가 그린 <정원에 있는 여인들>이 살롱에서 낙선하여 생활이 많이 힘들어졌다. 1867년 8월8일에는 첫아들 장이 태어났고 1870년이 되어서야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임박하자 모네는 노르망디 해변에 있는 트루빌로 갔다. 그 후 혼자 런던과 네덜란드를 다니며 그림을 그렸고, 이때 그린 그림이 살롱에 출품되어 성공에 이르는 발판이 된다.
부댕은 모네가 여행을 다니며 그린 그림을 보고 감탄하여 `나는 모네가 타고난 소질이 있으며, 새로운 미술 운동의 선두주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시점에서 명쾌한 색채 표현이란 점에서 커다란 기술적 향상을 가져왔다.
1872년 귀국,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살면서 센 강변의 밝은 풍경을 그려, 인상파양식을 개척하였다. 1874년 파리에서 `화가, 조각가, 판화가, 무명예술가 협회전`을 개최하고 여기에 12점의 작품을 출품하였는데 출품된 작품 <인상·일출(日出)>이란 작품 제명에서 인상파란 이름이 모네를 중심으로 한 화가잡단에 붙여졌다. 이 후 1886년까지 계속된 인상파전에서 5회에 걸쳐 많은 작품을 출품하여 대표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모네는 프레데리크 바지유와 좋은 친구가 되었다. 모네와 바지유는 파리 바티놀 가에 있는 작업장을 함께 사용했다. 그래서 인상파화가들을 `바티뇰 그룹`이라고 불렀다. 그 곳에 있는 카페 게르부아에서 매주 목요일밤 화가들과 만났다. 거기서 그는 판탱라투르, 세잔, 드가, 그리고 미술평론가인 뒤랑티와 작가인 에밀 졸라를 만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1876년, 모네는 백화점 주인이었던 에르네스트 오슈데를 만나게 되는데 오슈데는 모네의 그림을 매우 좋아하여 자신의 소유지인 로텐부르크 성에 모네의 작업장까지 마련해 주었다. 오슈데는 여러 인상파 화가를 후원했는데 후에 사업이 어려워지자 가지고 있던 그림을 팔아야했는데, 이로 인해 화가들의 그림값이 떨어지기도 했다.
1878년에는 센강변의 베퇴유, 1883년에는 지베르니로 주거를 옮겨 작품을 제작했고, 만년에는 저택 내 넓은 연못에 떠 있는 연꽃을 그리는데 몰두하였다.
모네의 작품은 외광을 받은 자연의 표정에 따라 밝은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지 않는 대신 `색조의 분할`이나 `원색의 병치`를 이행하는 등 인상파기법의 한 전형을 개척하였다. 그는 동일 주제를 아침·낮·저녁, 날씨에 따라 으로 시간에 따라 연작한 태도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1880년대에는 인상파의 전형적인 기법을 보다 과학적으로 발전시킨 신인상주의가 등장하였는데 쇠라, 시냐크 등의 점묘법이 대표적 화법이다. 이들은 순색의 작은 점을 사용한 화면구성을 통해 보는 이의 망막에서 중간색이 형성되는 시각혼합효과를 노렸다. 이무렵 세잔은 변화무쌍한 외계의 재생을 거부하고 사물의 본질과 영속적 구조를 탐구하여 색채보다 형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풍만하고 귀여운 여인상을 주로 그린 르누아르 역시 인상주의의 전형성을 탈피하게 되었으나 모네만은 인상주의 개념을 끝까지 충실하였다.
모네는 생전에 명성을 떨치게 되어 말년을 풍요롭게 살았던 화가에 속한다. 매독에 걸려 50대 초반에 사망한 마네나, 권총자살한 고흐, 전사한 바지유 등과는 다르게 마네는 무려 86세까지 살면서 온 세계의 인정을 받아 말년에는 전 세계 뮤지엄에서 그의 작품을 구매하기 위해 줄을 섰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모네의 많은 인터뷰 기록, 기사, 평론, 전기가 전해지고 있다.
마흔 살 무렵에 화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쉰 살 무렵에는 미국인 화가들이 모네와 가까워지길 원하여 지베르니로 찾아올 정도였다.
인상주의는 순간적인 빛의 효과를 포착하기 위해 시도함으로써 보다 큰 자연주의를 달성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와 동시에 그 시대에 용인되어 온 관례에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게 해 주었다. 그럼으로써 당시의 예술 운동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부유한 미국 기업가들이 모네나 다른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하는 등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인상주의는 20세기 현대미술을 탄생하게 한 시발점으로서 미술사상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수련 연못(The Water-Lily Pond)

88.3 x 93.1cm

캔버스에 유채

1899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인상 해돋이(Impression Sunrise)

48 x 63cm

캔버스에 유채

1872년

 





The Women in the Garden

1866-1867년


 





Train in the Country

oil on canvas

1870년


공유하기

 

MYAR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