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노트

현대 예술은 일상적 현실을 반영하는 것을 뛰어넘어서 그 보편적인 현실을 능동적 태도로 변화시키고 재창조하고 있다. 이제는 어떤 개념을 표현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매체나 방법을 통하여 예술의 방식을 전개시키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 본인의 작품을 크게 두 가지고 분류해 볼 수 있다. 형식적인 면은 사실적 표현을 통해 인체의 전체 또는 부분을 확대하거나 축소해서 표현하고, 내용적인 면은 모든 것이 불확실성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의 공허함과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고 있는 인간 소외와 익명성으로 치닫는 '청소년의 사회적 심리성'을 표현한 것이다.

청소년의 내재되어 있는 사회적 소통의 불만과 표현의 중심이 된 란 주제는 신과 인간, 자아와 타자, 그리고 특히 세대와 세대간의 소통불가능에 대한 반응이 엿보인다. 이는 서로 다른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지만, 일관된 주제의 의미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서로 통한다. 동일한 언어의 궁극적인 의미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언어를 매개로 한 인간과계의 의문을 갖고 표면에 나타난 이미지의 내용에 집중하고 있다.
한편, 본인의 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사조의 흐름은 고전주의 방식에서 출발해서 하이처리얼리즘에 이르고, 미디어의 세례를 받은 영상세대의 감성을 반영하는 사진같은 그림의 이미지 표현을 덧붙일 수 있겠다. 또한 신테의 절대미를 추구하던 고전주의 방식의 신체표현에서 해체가능하고 조작과 변화가 가능한 대상으로서 신체를 표현하기에 이르는 현대적 예술의 표상을 보여준다. 자아의 분열과 욕망, 인간의 이중성은 비가시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대상이 된다.
결국 신체는 대상으로서의 사실적 외관을 상실해가는 경향을 보이거나 과장하거나 혹은 확장되기도 한다. 특히 클로즈업 된 신체의 일부는 그것의 기능에 따라서 각각의 상징성을 암시한다. 인물화의 사실적이고 외적인 표현과 회화 공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여백의 의미와 인간의 내면의식을 표현하고 그 다양한 이미지를추구하는 것에 그 중요한 의미를 둔다.

본인 작품의 이론적 배경이 된 것은 인체 표현과 공간 표현의 문제를 제시하고 그에 따르는 예술적 지표가 되는 예술가들의 개념을 참조하기에 이른다. 신체표현은 사실주의 경향을 상실해가는 경향을 보이는 뭉크와 폭록, 베이컨, 관음주의를 연상하는 크레모니니의 왜곡와 변현, 절단된 신체의 표현의 이미지는 하이브리드의 형상을 낳게 된다. 이것은 현대 미술이 지니는 애매성과 혼성성에 특징으로 포스트모던의 얼굴을 나타낸다. '공간 표현'에 대한 것은 회화로서 역할과 여백으로서 의미를 포함하는 화면구성을 이야기한다. 질료적인 문제를 뛰어 넘어 정신의 추구를 함께 하는 기운생동과 제스처를 드러내는 동서양의 합일점을 찾게 한다.

한편, 본인의 작품은 사실적 인체표현으로 형식적 태도는 매개체로서의 사진을 선택하고 그것은 이미지의 생략과 극대화를 말한다. 여기서 인간은 신체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존재하고 몸은 단지 유기체로서의 물질덩어리만이 아니고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 육화된 상태만이 존재하는 것 또한 아니다. 몸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가 아닌 존재자와 함께 하는 방식으로서 인체는 최고의 창작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회화적 방식에 대한 개념을 논하기 위해 피카비아에서 리히터에 이르는 사진적 회화의 면모들을 보여준다.

의 조형적 작품분석은 기호학적 접근에 이른다. 그것은 밝음과 어두움의 대조를 구성하는 조형적 처리와 암시적인 내용 표현하고 있다. 바탕으로서의 면, 각각의 형상을 나타내는 덩어리: 인물 상반신의 옷감의 면, 머리카락과 어두운 면, 그림자 같은 최소한의 기호는 주제와 같이 그들만의 언어를 위한 것이다.
다음으로 는 이항대립의 구조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종속과 반복'의 의미를 보여주며 그림의 전체적인 성격이 강하게 결정된다.

결론적으로, 본인의 작품을 통해서 밝히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소외와 익명성은 현대사회가 만들어낸 산실이라고 보며, 그것을 작품이 지닌 기호학적 기능과 동시대의 미적 감수성(영상적 이미지)은 인간이 내면의식을 드러내는데 충분한 시각적 언어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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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평론

이달에 만난 정종기展 (09.6.17~7.5)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얌전히 빗었거나 아래를 묶었거나 늘어뜨린 머리채에다 가방을 어깨에 걸친 앴띤 소녀들의 쉿모습을 담고 있었다. 사진을 옮겨 그린 솜씨가 범상치 않다. 그림 속의 소녀들이 바라보는 전방에는 사라져간 희미한 꽃잎들이 점점이 있거나, 형해로 변한 희뿌연 군중들, 쓶겨진 한강철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 공간이 휑하니 펼져진다. 작중 인물들은 과거에는 존재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이를테면 머나먼 기억의 나라, 부재의 나라, 무(無)의 세상을 무심히 바라본다. 그들은 모두 관객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 그들은 모두 관객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 얼굴이라 해야 가냘픈 뺜과 가녀린 귀가 전부다. 소녀들은 짝을 가려 나란히 서있거나 마주 서있거나 꽃을 들었거나 대지에 앉아있다.
화자(畵者)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치밀하고 정교하게 그리면서 한결 같이 뒤만 그렸다. 앞을 그리지 않은 건 의도가 있어 보인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보는 사람의 감동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무언가 속내를 말하기 위해서 그렸음이 틀림없다.
그 '무언가'를 말하자. 그림 속의 이미지를 읽고 말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의미분석가들이 말하는 '화자의 도'란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해석자의 의도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화자의 의도를 염두에 두고, 그가 무슨 마음에서 저렇게 그렸을까를 생각하면서 이미지를 감상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걸 '이미지를 읽는다'고 한다. 가까운 친구나 연인이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고 하자. 그들이 항상 그랬던게 아니라 돌연 찡그렸다면, 그들이 찡그린 속내가 뭔지를 꼬집어 말할 수 있을까? 분명히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늘 같이 지내온 터여서 그가 찡그린 뜻이 뭔지는 대강 알 수 있다. 그림과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정종기의 소녀들을 보면, 어떤 의도에서 그가 소녀들의 앞모습이 아니고 돌아선 모습을 그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그가 그린 뒤돌아선 소녀들은 무언가를 사실한 사람들의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또한 동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체험한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가 그리는 이미지의 주인공은 대개가 어린 소녀들이고 때론 소년들이지만, 왜 어린 주인공을 등장시켰는지는 별개로 생각해야 한다. 자연의 품에서 뛰놀고 꿈꾸며 한참 자라야 할 때, 사회적으로 급증하고 있는 결손가정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온갖 사교육장으로 내몰려 꿈을 상실한, 우리 시대의 희생자들이라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상실'은 언제나 가장 아픈 대목이다. '상실의 시대'란 비극의 극한을 두고 하는 말이다. 뭔가 가지고 있었던 걸 빼앗겼다는 뜻이다. '빼앗다'는 말의 영어 'deprivate'의 어원은 중세 라틴어 '데프리바레(deprivare)다. 이 말은 '분리'를 뜻하는 접두어 'de'에다 탈취를 뜻하는 'privare'를 합친거다. 애초 가지고 있던 걸 탈취당함으러써 처음의 상태에서 멀어졌다는 거다.
우리는 소녀들이 무엇을 빼앗겼고 무엇에서 멀어졌는지를 생각하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정종기의 작중 인물에는, 이른 바 실존의 상실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다. '실존의 상실'하면, 독자들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소설 [구토]에 나오는 주인공 '로깡땡'을 떠올릴 거다. 사람들의 유형을 가리켜 '로깡땡 형'(型)이라하면, 하잘 것 없는 곤충인 파리가 날라가다 하필이면 목구멍으로 넘어가 구토를 느끼는 과민형의 현대인을 지칭한다. 고대의 '외디푸스 형'이나 근세 초의 '햄릿 형'과는 아주 다른 형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늘 우리가 아닌 것들의 침입으로 본래의 내가 훼손되고,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타자)가 되는 데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거다. 박찬욱 감속의 [박쥐]가 올 칸느영화제에서 수상했다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 그의 수상 이유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그의 영화에서 주인공이 애초에는 독실한 신부였으나 날이 갈수록 타자인 뱀파이어가 되어 실존을 상실한 채 결국 한줌의 재로 변한다는 내용이다. 우리시대의 상실 치고는 극한을 보여준다.
작가 정종기 역시 소녀상을 빌려 실존의 상실을 말한다. 그는 실존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소녀들을 그린다. 상실한 소녀들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허망한 흔적의 세계를 바라보는 걸 극적으로 그려낸다.
그의 그림은 상실한 우리 시대의 인간상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부재의 세계를 조우시킨다. 그의 [TALK]는 부재와 상실을 동시에 앓고 있는 우리 시대의 세계상과 인간상의 단면을 오버랩함으로써 그 실상을 보다 명징시킨다.
그의 상실을 이미지의 치밀함(소녀)으로, 부재의 흐릿함(배경)으로 차별화해서 교차시킨다. 소녀들은 카트메티의 조각이나 뷔페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결코 훼손된 인간상이 아니다. 머리칼은 물론 어깨와 허리에 걸치고 있는 가방이나 복장을 건실하고 치밀하게 그렸을 뿐 아니라, 배경은 배경대로 소멸된 잔해와 흔적들을 리얼하게 부각시켰다. 그가 그리는 인간상과 세계상은 어딜 보아도 현실 그대로 리얼한 것들이다. 그는 이것들을 빌려 철저하게 상실된 인간들과 부재의 세계를 폭로한다.
그의 근작들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더 높은 단계의 메시지를 전한다. 상실과 부재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비탄과 충격은 그 또는 그녀를 빼앗겨 그들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상실과 부재는 침묵으로 이어진다. 정종기의 소녀들이 그림 속에서 무너가를 이야기 하는 듯 하지만, 사실상 무거운 침묵 속에서 부동 (不動)라는 그림자로 읽힌다. 차갑고 굳어있다. 생기가 없다. 물화(物化)되었다. 소녀들이 간직해야 할 영혼(아우라)이 실종되었다. 상실의 극치이고 부재의 극치같다.
침묵을 그림으로써 정종기는 최종 우리 시대의 가치 부재와 영혼의 살싱을 말한다. 그의 [TALK]는 상싱과 부재에 대한 헌사다. 토크다 없는 토크다. 말이 토크이지 토크가 아니다.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게 바로 우리시대의 실상이 아닌가? 작가는 모순을 빌려 우리 시대를 이야기 한다. 일반이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치밀하고도 아름다운 필치와 색조, 일견 상식적인 그림양식을 빌려 모순을 그린다. 그가 그리는 모순은 아름다운 모순이다. 요즘 정종기의 그림이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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