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ARTS

  • 작가명 : 유주희,  mixed media 145 x 145c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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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평론
표면을 사유하는 미끈거림

강 선 학(미술평론가)


유주희 작품에서 일견되는 인상은 어떤 표상의 부담도 없다는 점이다. 이 세상 무언가를 대신해서 표현해준다거나 알만한 것들의 연상을 통해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형상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보는 이에게는 손에 잡히는 게 없어 이해하기 힘들게 하지만 기존하는 표상적 구속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면에서 그의 작품은 독특한 체험이다. 그것은 이미지 자체를 충족과 자율성을 가진 독립된 사물로 만난다는 것이다. 흔히 미술을 좋아하고 현대미술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그런 만남을 낯설어하고 때로는 거부한다. 그럴 때 그들의 현대미술 이해란 어떤 것일까. 곤혹스러운 순간이다.
“예술의 경험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바로 이러한 존재자 없는 존재의 지각이다. ...의식대상으로서의 사물은 의식행위를 통해 의식과 동일화된다. 하지만 예술은 사물들을 세계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사물들이 의식에 포섭되는 악순환을 유예시킨다. 예술이 만들어내는 세계 속에서 사물은 자신의 고유한 외재성을 보존한다.”<박평종.흔적의 미학> 작품의 독자성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것, 기존하고 있는 세계에 묶어서 자신의 이해 정도에서 이해하려는 한 유주희의 작품은 난해할 뿐이다. 그에게로 가는 길은 그런 기존하는 이미지의 연상을 통해 접근하거나 이해하려는 생각부터 접어두어야 한다. 그에게는 그가 통제하지 않으려는 새로운 오브제의 생성을 제기할 뿐 어떤 이야기도 거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상으로부터 단절된 순간을 거부한다면 그에게 다가갈 길은 없는 셈이다.

스퀴지의 민 자국이 바탕 위에 나타나면서 운동과 방향, 색상의 차이, 두께와 재질을 만든다. 밀린 자국이 색과 재질이 되고, 밀린 자국이 화면의 방향과 주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유주희에게서 밀린 자국은 흐름과 운동과 기포와 두께이자 그가 드러내고자 하는 시각이미지의 전부이다. 우연적인 색상 혼합과 의도된 색 면의 대비로 이루어진 화면은 일견 단조롭다. 방법이나 의미 역시 반복적일 뿐 새로운 시도로 작품 간의 변별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반복적 운동이 흔적으로 시각화될 뿐이다. 흰색과 검은색의 자연스러운 섞임. 수평으로 밀린 자국들, 그리고 밀어내는 힘의 정도에 따른 물감층의 두께의 차이. 그리고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수직흐름과 기포, 번짐, 파선 등이 단조로움 안에서 단조로움을 피해가게 한다.

앞 시기의 작품에서 단편적인 스퀴지 자국이 여기저기 단일한 이미지로 화면 속에 부유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그 단편적 흔적이 화면 전체를 덮고 있다. 기본적 이미지가 앞 시기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지만 화면을 구성하는 방법의 차이에서 스퀴지 자국은 단순한 기법이나 방법이 아니라 내용으로 어떻게 확장되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앞 시기 작품과 대조에서 드러나는 변화이다. 변화란 단색 바탕에 자유로운 스퀴지 자국을 남기는 것으로 배열과 배치, 흔적의 의도성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 자국이 화면 전체를 장악함으로 단속적 흔적에서 전체의 흐름으로, 부유하는 단편적 이미지에서 흐름의 연속성으로, 단속적 행위를 시간의 특성으로 전이시켜 준다.

화면 하단이나 상단의 단색조의 면들을 띠처럼 처리해서 스퀴지 자국과 구별하여 화면을 이원화 시킨 것은 우연과 필연의 대비를 구성의 기조로 삼은 앞 시기의 단편성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자기제어의 공간과 행위에서 재질, 행위, 오브제의 자율성 사이의 차이를 선명하게 인식한 것이다. 말하자면 같은 기법이라도 그것이 단편적이냐 전체적이냐 하는 태도에서 다름이 생겨난다. 흐름을 흐름 자체의 운동으로 이해하는 작가의 태도에서 화면과 스퀴지 자국, 재질의 의지가 달라지는 것이다. 구성된 것에서 생성되는 것으로 진전된 것이다.
특히 앞 시기와 다르지 않는 스퀴지 자국을 화면 여기저기에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가장자리를 넘어서는 행위의 연속성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그 결과 자기 통제를 넘어 새로운 운동으로 변성된다.
흰색과 검은 색의 스퀴지 자국은 행위의 흔적, 힘의 방향에 따른 색상혼합을 보인다. 그것은 그려지거나 칠해진 것이 아니라 힘의 강약과 물감층의 두께에 따른 색상혼합으로 다르게 나타난다. 그 흔적은 주로 수평이고 이제 화면 밖으로 넘친다. 그 넘침에는 어떤 제제도 없다. 그게 그의 변화이다.
운동은 이제 의지 밖의 어떤 것으로 자율성을 갖고, 작가의 의지와 무관한 사물이 된다. 거기 있는 것, 무엇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것으로 있는 것이다. 표상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의 이미지들이 자유로워진 것이다. 표상에서 자유로워지듯 그의 시각이미지, 혹은 화면의 구성에는 깊이, 다층성, 혼합과 누적에 의한 층위의 문제가 없다. 눈에 보이는 층위, 일차원적인 표층만 있을 뿐이다. 깊이 없는 표면의 사유이다. 그것은 작가의 사유의 깊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시각이미지가 주는 표면적 사유의 자유로움 혹은 사물로서의 온전함이다. 깊이라는 무거움, 부담이 아니라 있는 그것으로 충만한 사물을 말한다. 표면적인 것으로 산란하고, 자유롭다. 그 밑이 없는 표면의 것으로 의식의 뿌리라는 부담보다 표면이 가진 운동에 치중한다. 캔버스는 캔버스 자체의 논리에 의해 구축될 뿐이다. 그 밖의 것은 없다. 바깥의 표상으로부터 벗어난 사건을 보게 된 것이다.

그의 작품은 작가의 논리, 보는 이의 논리를 벗어나 표면이 배면인 세계, 배면이 표면의 흔적일 뿐인, 배면이 표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표면이 깊이다. 바깥 세계를 대신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가 민 자국에 밀려서 미끄러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의 작품에는 현재가 있을 뿐, 배후가 없다. 그 자신의 행위랄 수 있는 흔적이 있을 뿐, 표면을 지배하는 깊이의 유혹이 없다. 그의 표면은 미끈거리고 스치고, 멈추면서 운동을 만들고 그 운동은 캔버스를 벗어나 어딘가로 간다.
표면을 사유하는 미끈거리는 스퀴지의 흔적은 그의 시선이자 사유이다. 그리고 사유의 무게. 깊이의 부담을 갖지 않는 이미지로서 충족된다. 그러나 그 자신 흔적의 층위가 가진 단조로움의 문제, 의미와 행위의 다층이 만드는 화면의 다층적 층위의 요구가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하히 표면의 사유를 이끌어가서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넓히느냐 하는 것은 분명 그의 몫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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