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학사과정) 조형예술과를 졸업한 백정기(1976) 작가는 2007년 신한갤러리 전시공모 당선과 2007-2008 대안공간 ‘미끌’ 작가공모에 선정되어 전시를 가진 미디어 아티스트이다. 그의 작품들을 얼핏 보면 입체나 설치 작품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굳이 스스로를 ‘미디어 아티스트’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사람과 세상 사이에 있는 미디어의 속성과 효과를 관찰하고 지난 몇 년간 RMP(ridable multimedia player탈 수 있는 멀티미디어 플레이어) 작업을 통해 오늘날 미디어 환경에 대한 반성과 일탈을 꾀하는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며, 보이는 형식보다 작가 자신이 추구하는 주제에 무게 중심을 두기 때문이다.
2008년 대안공간 미끌'에서 전시된 백정기 작가의 는 미디어에 의해 감각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미디어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우리 시대의 미디어 환경은 ‘디지털’과 ‘네트워크'라는 패러다임 속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를 거듭하면서, 사람들에게 큰 의미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디어는 이제 그 자체로 우리 삶의 환경이며, 우리는 마치 이러한 디지털 미디어 환경이 인류가 꿈꾸는 모든 것들을 실현해 줄 것이라 믿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개 속에서 인간의 감각과 신체 능력은 오히려 약화되고 퇴화되고 있다. 가끔 버튼을 몇 개 누를 뿐, 편안함을 넘어서서 할 일이 없어진 인간의 몸은 공상과학 영화의 미래 외계생명체처럼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은 아닐까하는 상상을 쉽게 해볼 수 있다. 백정기 작가는 이러한 미디어 환경 속에서 균형 감각을 잃은 현대인들의 신체 감각을 중화시키기 위해 대안적 미디어로서 RMP를 제시한다. 현대 미디어가 주는 현란함에 의해 균형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스스로 멀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그는 지적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미디어를 통한 경험은 간접적, 순간적, 그리고 수동적이기 때문에 이로 인한 공허함과 허전함을 감출 수 없다. 실제로 우리의 정신과 몸은 그러한 분위기에 젖어 불균형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주어진 미디어의 환경에 이끌려가게 된다. 그의 <멀미를 회복하다>는 그런 불균형을 인식하는 것에 대해 담론하자 한다.
백정기의는 비디오, 오디오, 빔-프로젝터 등의 미디어 장치를 조합해서 타는 멀티 미디어 장치를 만들고, 작가 자신이 직접 그 장치(자전거)를 타고 서울 일주(총 주행거리52.5km)를 하면서 촬영하고, 찍은 영상을 미디어 장치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기존의 미디어 장치와 달리 그의 장치는 도로의 상태나 환경에 따라 반응하는데, 먼지, 바람, 그리고 날씨의 상황과 탈것을 타고 가는 신체적 감각을 미디어에 인위적으로 반영한다. 즉, 고무바퀴가 아닌 나무와 철로 직접 바퀴를 제작해서 지면의 요철을 완충장치 없이 몸으로 직접 전달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촬영한 풍경은 상당히 거칠고 흔들리고, 이런 화면을 보고 자전거를 타고 가면 곧 혼란과 멀미가 생긴다. 즉, 이 장치를 통해서 접하는 세계는 비약적으로 확장되지 못하고 몰입감도 떨어진다. 하지만 바로 그 멀미작용, 사타구니의 통증, 그리고 다리의 피곤함은 우리의 관심이 미디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방지한다. 그러한 미디어는 기존의 미디어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에 대해 거리를 두고, 새로 조직하고, 간섭하는 형식과 내용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렇게 불편하게 미디어를 이용함으로써 주체는 미디어와의 관계를 숙고하고, 미디어 장치가 요구하는 선별된 감각을 거부하고 더 나아가 미디어 세계와 대응하는 새로운 관점을 확보하는 가능성이 생긴다. 따라서 그는 이런 전략적 미디어가 개인적 체험으로 그치지 않고 보다 많은 사람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실천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용설명서와 조립도를 제작했다. 결국 백정기 작가의 대안미디어 RMP-b를 바라보며 관객은 미디어를 통한 사유와 신체의 움직임을 보충, 대체하고 있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미디어의 정보를 반성 없이 받아들이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미디어와 인간이 어떻게 건강한 조화를 이루며 가공된 미디어의 세계 속에서 인간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미래를 가꾸어나갈 생각의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백정기 작가의 작업을 크게 두 가지로 말하면 ‘탈것 시리즈’와 ‘책상 시리즈’로 나눌 수 있다. [늙은 말의 지혜]는 책상 시리즈로서 늙은 말이 길을 찾아 준 옛 이야기에서 작가는 문자화되지 못한 지식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즉, 일방적으로 주어진 지식이란 이름으로 강요되는 공부를 방해하는 작업이다. 책상이란 것은 공부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의 작품 속에 제공된 책상과 책들은 실제적으로 공부를 못하게 한다. [늙은 말의 지혜]는 책상 위에 원천적으로 다른 물건이 차지하고 있어서 책상을 사용할 수 없다. 공부하는 책상 위에 백크라이트라는 공업용 재료를 쌓아올린 작업이다. 문자가 주는 지식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노하우가 담긴 공업용 재료가 주는 상징을 따온 것이다. [공부만하세요] 작품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공부를 깊이하기 위해서 도서관을 찾아가고, 옆에 칸막이를 치고 자신이 보는 책만 불을 켜 집중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작품은 바로 그 부분에 홀로그램으로 신비롭게 'TV도 보세요'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그래서 공부를 하러 와서 불을 켰을 때 공부 대신 재미있는 TV를 보게끔 유도하는 장치다.
10여 년 전, 백정기 작가는 홍익대학교 회화과에 다니는 다른 많은 학생들이 그러하듯 회화(painting)에 몰두하고 고민했지만 혼란과 회의를 겪으며 회화를 중단하게 된다. 사실 다니던 학교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주변의 걱정 어린 시선도 많았지만, 개인적인 고민과 사회적인 환경으로 인해 그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그리고 회화 이외의 사진, 비디오, 웹미디어, 그리고 더 나아가 홀로그램 등등의 분야를 만나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주제를 드러내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새로운 기술들을 차근차근 섭렵해 나가던 그는 미디어라는 새로운 도구에 심취하고 매체 그 자체를 위한 실험을 해왔으며, 2006년에 이르러 미디어라는 새로운 도구를 보다 창의적 방식으로 다루며 기존의 미디어 환경을 환기시키는 내용을 세상에 드러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백정기 작가의 이런 작업에 대한 주변의 반응은 그리 녹녹치 않았다. 사실 작가 스스로도 작업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과 관객으로부터 이해의 영역을 얻어내지 못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다 보니 작업으로 인한 예술가로서의 시너지 효과가 부족하고 그러한 상황은 작가 자신을 더욱 반성하게 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런 과정과 함께 그는 조용한 변화를 꾀하고 있다. 그는 최근 소리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그에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다. 미디어에 대한 기초지식을 다시 집어보고 있는 중이다. 그동안 자신의 작업에서 시각적인 부분에 치중했던 것을 수정하고 소리와 조화를 이루어 작업을 이루어낼 것이라 했다. 그가 걸어왔던 진지한 삶의 발자취를 생각해 보면 이번에 시도되는 그의 작업에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