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이러했을 것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 격리 구역은.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ogo)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독자를 혼란과 공포로 몰아 넣으면서 상당히 불편하게 만든다. 이 불편함은 곧 인간에 의한 것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눈이 멀게 된 자들이 정부에 의해 격리되면서 상상하기조차 힘든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드러낸다. 무질서, 폭력, 강간… 도저히 이성을 지닌 자들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비인간적인 행위가 난무하는 격리 구역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이다. 설령 꿈이라 하더라도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는 비단 <눈먼 자들의 도시>뿐만 일까…

 

 

 

고야는 병원이나 수용소가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박탈하는 곳이라고 여겼다. 그래서인지 그가 그린 <정신병원 수용소>의 인간은 유독 의지가 약해 보이면서도 알 수 없는 광기에 휩싸인 듯 보인다. 고야는 이 격리된 희생자들을 직접 목격한 후, 인간의 또 다른 본성을 느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욱한 어둠 속에서 인간의 알 수 없는 비명을 들었기 때문인지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진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이 단 한 점의 이미지는 참으로 강렬하다. 어둠뿐인 수용소와는 정반대로 그 천장은 빛이 가득 메우고 있다.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카오스가 존재한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여기에 인간이 있다.

인간은 아주 나약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잔인한 존재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은 하나의 체제가 무너지면 동물이 되고 만다. 이것은 일종의 권력과도 같은 이데올로기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충돌로 인해 인간은 너무나 끔직한 일들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인간에게는 세상을 발전시킬 수 있는 지혜가 있으면서도 진정 옳은 것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혼재한다. 이것이 곧 인간이다.

고야만큼 ‘인간’만을 그린 화가가 또 어디 있을까. 고야만큼 인간의 본성에 주목한 화가가 또 어디 있을까. 스페인의 궁정화가에서 프랑스를 떠돌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고야의 주제는 늘 ‘인간’이었다. 고야가 그린 인간의 얼굴은 영혼의 이미지를 반영한 거울처럼 사실적이고 생생하다. 이렇듯 고야는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인간의 본질적인 개성과 내면의 세계를 보여주고자 했다.

 

 

 

고야가 궁정화가로 활동하던 30여 년간 스페인은 그야말로 암흑의 시대였다. 고야는 유럽의 혁명, 외국의 침략, 내전의 결과들을 온몸으로 겪어야만 했다. 특히 나폴레옹 지배 당시 그린 그림들은 전쟁의 잔혹한 참상을 생생하게 다루었으며 폭력과 광기로 물든 인간의 내면을 묘사하는데 집중하면서 고야는 마치 역사가인 냥 자신이 목격한 비참한 현장을 야만적인 시각으로 그려냈다. 고야는 파괴적인 인간의 만행을 끊임없이 경험하면서 좌절감에 빠져들었으며 치유 불가능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괴로워했다. 이후 고야의 주제의식과 그림은 더욱 어두워졌으며 청력을 상실한 말년에 이르러서는 환상이 짙은 ‘검은 그림(Black Painting)’을 그리기 시작했다. 음울함이 짙게 베인 검은 그림들은 혼돈의 시대를 살았던 고야의 심리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인간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오히려 더 유령 같고 괴물 같아 보이는 이 환영의 이미지들은, 아마도 두려움과 혼란이 만들어 낸,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이리라. 공포와 어둠에 휩싸인 인간을, 아니 유령을, 아니 괴물을 그리면서 고야는 과연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고야의 주요 장점은 기괴한 것을 신뢰할만하게 창조했다는 데 있다. 그의 괴물은 생생하고 균형도 잘 잡혀있다. 괴기스런 실체를 창조하는 데 고야보다 과감하고 깊이 있게 나아간 이는 없었다. 이 모든 뒤틀림, 짐승 같은 얼굴, 악마 같은 찌푸린 상은 대단히 인간적이다. 한마디로 현실과 환상이 어느 지점에서 엮여 결합되었는지 말하기 어렵다. 둘 사이의 경계가 너무도 능란하게 교차되어 정교한 분석으로도 그 경계를 추적할 수 없다. 그 뒤에 숨은 예술이 너무도 탁월하기 때문이다.”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Charles-PierreBaudelaire)

 

고야에게 영향을 받은 화가들은 많지만 그의 후계자는 단 한 명도 없었을 만큼 독자적인 화풍을 추구했던 고야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새로운 시대를 창조했다. 이 놀라운 창조 의 이면에는 짐승과 같은 인간의 모습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같은 광기와 야수성을 통한 인간 존재의 진실함을 자꾸만 외면하고 싶어지는 것은 왜일까.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처럼.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 눈먼 자들의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