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ARTS

작가

작가 인터뷰

정혜숙
발굴의 기쁨
2010.05.28

인터뷰 날짜 : 2010.01.07
인터뷰어 : 나비
글 작성자 : 나비

어린 시절, 흙장난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 그때로 돌아가보면 오밀조밀한 기억들이 반짝인다. 소꿉놀이는 물론이며, 토닥토닥 쌓았던 두꺼비집, 그리고 또 다른 세계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이끌려 파내기 시작했던 앞 마당 혹은 학교의 드넓은 운동장 한 켠. 그러다 보면 꼭 발견하게 된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조개 껍질이나 유리 조각, 혹은 그와 비슷한 파편들을. 어쩌면 어렸을 적 우리는, 아틀란티스와도 같은 미지의 세계를 몹시나 동경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늘 살아있던 전설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그 고왔던 상상력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시간을 되돌려 지나간 세월에 묻혀 있는 그 기억들을 다시금 끄집어 내 본다. 과거로의 향수를 자극하는 정혜숙의 작품을 만나기 위해.

부족 113 x 113cm 패널에 아크릴, 세락믹, 에폭시 2009

정혜숙의 작업은 독특하다. 평면에 자기(磁器) 붙인다. 그것도 깨진 그릇을. 그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 없다. 그것은 반듯하게 절단되었거나, 파편화된 조각들로 흩어져 평면 위에 놓여있다. 마치 물에 잠긴 채 둥둥 떠다니는 그릇 같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바람결에 날리는 치마 같기도 하며,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가 언제라도 튀어나올 듯한 요술램프 같기도 하다. 볼수록 흥미로운 그녀의 작업은 유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달콤한 ‘노스탤지어(nostalgia)’이다. 어릴 적, 흙장난을 하며 발견했던 유리 조각을 보고 ‘이건 또 누군가가 부부싸움을 하면서 깨진 그릇이겠지?’라며 귀여운 상상력을 키워왔던 소녀는 훗날 깨진 그릇을 평면에 옮겨 붙이는 어른이 되었다. 그렇게 땅파기 놀이에서 시작된 유희가 지금의 작업에 영향을 준 것에 대해서 그녀는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사소한 것들이 추억이 되어 작업의 베이스처럼 차곡차곡 묻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 일본식 가옥에서 살았어요. 집 구조도 너무 특이했고, 할머니 할아버지랑 함께 살아서 그랬는지 옛날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사람마다 특별한 기억이 있듯이 제게도 남들과는 조금은 다른 기억들이 있었죠.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아직도 호기심이 생겨요. 어릴 때, 제가 들어가지 못하는 방이 있었어요. 아주 예쁜 그릇이 진열돼 있는 방이었는데 거기 있는 그릇들은 할머니, 할아버지 생신 때만 사용하는 아주 소중한 것이었죠. 제게 그릇이 있던 그 방은 너무 아름답고 보석 같았어요. 하지만 특별한 날, 정성스럽게 준비해야 하는 여자들한테 그 방의 그릇들은 노동이기도 했지요. 그래서 저한테 세라믹이라는 소재는 그릇 이상으로 추상적인 이미지로 많이 다가와요. 여성적인 것, 빛, 소리 이런 면으로도요. 그래서 세라믹을 이용하면서 그 소재가 주는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어요.”

추상적인 느낌을 자신만의 형태로 바꿔가고 있는 지금의 과정이 재미있는 놀이 같다는 정혜숙. 그녀의 첫 개인전은 한국이 아닌 프랑스에서였다. 파리의 한국문화원에서 개최한 유망작가 지원전에 선정되어 드로잉과 세라믹 작업을 선보였는데, 기존의 작업이 드로잉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 때의 전시를 계기로 세라믹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용되었던 소재이지만 옛 스러움이나 남루한 느낌이 아닌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 그런 특별한 점들이 바로 그녀가 찾고 있던 소재였다. 그녀는 말릴 수 없을 만큼 지금의 작업에 푹 빠져있는 듯 했다. 그래서인지 작업이야기를 할 때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두 눈을 반짝인다. 열망하는 것을 배워가는 학생의 모습 같다. 한마디로 지금 그녀에겐 ‘좋아 죽겠다’는 표현이 딱 이다. 그녀가 이토록 빠져있는 세라믹의 매력은 과연 무엇일까.

“보석 같잖아요. 저한테 세라믹은 정말 보석 같고 유리알 같아요. 깨질 것 같은. 그러 면이 위험하지만 매력이 있는, 상당히 애착이 가는 소재예요. 작업으로도 굉장히 소중한 느낌이고요. 평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와 세라믹을 접목을 시키면 또 그것이 새로운 입체를 만들어 내고, 그림자를 만드는 그런 면들이 재미있어요. 사람들이 ‘왜 굳이 그릇을 깨서 만들었을까’하는 의문을 품는 것도 흥미로웠고요. 멀쩡한 그릇을 못 쓰게 만드는 과정을 통해 제 작업 안에서는 좀 더 새롭고 창조적인 형태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구멍 130 x 130cm 패널에 아크릴, 세락믹, 에폭시 2009

프랑스에서 공부한 터라 이국적인 정서가 가득할 것 같았는데 그녀의 작업은 오히려 한국적인 것, 전통적인 것에 대한 느낌이 강하다. 달 항아리에 집착한다는 그녀는, 정작 남의 것을 ‘발굴’하러 갔다가 반대로 자신을 ‘발견’하고 돌아온 셈이다.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돌아온 이상 그녀의 땅파기 놀이는 멈추지 않고 계속 될 것이다. 아, ‘땅파기’를 이야기하며 생각 났다. 공사 현장이나 자연재해로 폐허가 된 마을의 땅 속에서는 꼭 그릇들이 발견되지 않았던가. 그것은 도대체 몇 년 전부터 묻혀있었을까. 어떻게 변하지 않고 이렇게 자신을 지켜왔을까. 그 조각은 과연 누구의 기억이었을까. 잃어버린 것에 대한 ‘발굴’작업, 그녀의 세라믹 작업을 보면서 자기(磁器)에 대한 영원성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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