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이번 전시 <상기하다>에 대한 소개 부탁 드립니다.

A. <상기하다>의 부제인 영어로 reminiscence는 심리용어로 쓰였을 때 기억한 내용이 기억 직후보다도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에 더 명확하게 생각나는 일을 말합니다. 또한, 추억하는 행위나 비슷한 다른 어떤 것을 연상시키는 것도 reminiscence라는 단어로 설명됩니다. 이번 작업을 하면서 제가 형태를 다루는 태도가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형태를 ‘창의적’으로 만들기보다는 먼 기억 속에 각인된 나에게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형태들을 기억해 내는 행위로 그리기를 접근하였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았을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보르헤스 소설 ‘원형의 폐허’를 보면 꿈속에서 완전한 한 인간을 꿈꾸고 그를 현실세계로 불러들여 오는 일을 시도하는 마술사 얘기가 나옵니다.

`꿈은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으나, 조금 후에는 변증법적이었다. 그 이방인은 꿈속에서, 어는 면으로는 불타버린 신전이라고 볼 수도 있는 원형극장 중앙에 있었다. 학생들의 얼굴은 수세기의 거리를 두고, 별들만큼 높은 곳에 매달려 있었지만 아주 또렷하게 보였다`

소설에서 별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지만 아주 또렷하게 보이는 얼굴들처럼 내가 캔버스에서 드려내려고 하는 형태도 개인적인 ‘나’에서는 멀지만 항상 내 얼굴 앞으로 불러들이는 형태라는 점에서는 또렷하고 구체적인 어떤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Q. 대부분의 화가가 구상 작업에서 추상 작업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 구분이 명확하지는 않지만요. 작가님은 어떠한 계기로 추상화 작업을 시작하게 되셨는지요? 이와 더불어 예전의 작업들이 어떠했는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A.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 바스키아나 줄리앙 슈나벨. 필립 거스턴 같은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높았습니다. 그림 안에서 어떤 상황 속에 있는 사람이 주로 보이고 거기서 느껴지는 감정은 주로 ‘난처함’ 같은 것이었습니다. `세상과 편안히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느끼는 난처한 기분은 그림을 그리는 충분한 이유와도 같이 보였기 때문에 그림은 그런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막연히 오랫동안 생각 해 왔던 것 같습니다. 즉흥적이고 주관적인 표현이 강조된 자유구상 형식과 관조적인 추상화 형식의, 비슷하지만 다른 두 화법 사이에서 고민한 시간이 길었고 지금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Q. 작가님의 작업은 회화에 관한 칸딘스키의 언급을 떠오르게 합니다. 점, 선, 면 등 회화의 기본 요소들을 가지고 추상적인 형태로 이어 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A. 처음 작업을 시작할 때는 다소 방임하는 자세로 캔버스를 대합니다. 화면이 어떻게 되어갈지 한동안 지켜보겠다는 듯이 그립니다. 너무 공공연한 틀 속에 가두면 예상치 못했던 가능성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자기를 나눠주는 행위이기도 해서 그림 속에는 나의 진지한 면도 들어가야 하고 마찬가지로 멍청한 모습도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고요. 여러 가지 나의 다른 면들이 통합된 나를 만들 듯이 그림 안에도 최소한 양립하는 두 가지 성향이 실험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곡선과 직선의 얘기일 수도 있고 한 화면 안에서의 따뜻함과 차가움에 대한 얘기 일수도 있겠습니다.

Q. 곡선에 의한 추상적인 형태들이나 직선에 의한 화면 분할 등이 흥미로우면서도 진지하게 다가옵니다. 또한, 색감으로 표현되는 요소도 빼놓을 수 없겠고요. 이러한 시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A. 공감각적인 세계. 즉 시적인 공간의 창출입니다.
모든 창조적인 작업이 그러하듯이 회화 또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힘든 점이 많겠지만, 한편으로는 희열도 있으리라 봅니다. 회화에 관한 작가님의 의지 혹은 신념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그 자체로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아를 실현하는 한 방법이기도 하고 사회생활의 한 부분 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요즘은 지혜를 추구하는 방법의 하나로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Q. 작가님이 좋아하는 작가, 좋아하는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A.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은 정말 많습니다, 최근에 1950년생의 네덜란드 페인터 르네 다니엘(René Daniëls)의 작업을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37세의 뇌출혈이 있기 전까지 국제적으로도 활발히 활동했다고 합니다. 그의 그림엔 어떤 공간이나 상황이 연출되는데 항상 미스터리 한 분위기와 시적인 상상력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마그리트 초기작에서 보이는 짓궂은 농담 같은 것도 느껴집니다. 공간 속에 떠 있는 평면적인 나비넥타이가 그의 트레이드마크 같습니다.

Q.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는 주로 어디에서 영향을 많이 받는지 궁금합니다.

A. 막연히 생각했던 부분이 글로 명쾌하게 정리된 것을 볼 때 아이디어가 강화됩니다. 중세시대의 엠블럼에 대한 책을 읽고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뱀 우로보로스의 삽화를 보았을 때는 원(circle)에 대해 생각할 거리가 조금 더 생기고 하루키가 쓴 재즈 에세이에서 각각의 아티스트들을 묘사한 내용. 예를 들면 <우리가 게린 멀리건의 음악으로부터 일관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순수하고 내성적인 영혼의 숨결이다. 그리고 음악에 대한 그의 깊은 존경심이며, 등줄기를 곧게 편 당당함이다.> 이러한 글을 읽었을 때 나는 나의 그림 안에 ‘영혼의 숨결’이라 던지 ‘곧은 당당함’ 이러한 것들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