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일상을 주제로 하는 구상 회화가 자주 받는 혐의 중 하나는 그것이 ‘일기 같다거나’ 혹은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의 저변에는 회화가 개인의 삶을 충실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신뢰가 흐르고 있다. 그런데 이는 결코 녹록하지 않다. 미술사의 전통과 회화의 매체적 특성이 개인의 삶을 주제로 하는 구상 회화를 미술사가 담고 있는 역사와 이념의 대리물처럼 보이게 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의 삶이 작품을 통해 보편적인 역사의 일부로 드러나기를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들은 시각적으로 드라마를 닮았고, 그 안의 많은 것들이 서사문학의 클리셰나 역사화의 모방처럼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구상회화는 개인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은 것이 된다.
이상을 염두에 두고 볼 때, 김성국은 개인적 소재와 회화적 장치들을 활용하여 작품 속 일상이 기존의 특정한 문화에서 파생된 알레고리로 읽히는 것을 피하는 듯 하다. 이를테면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작업실 소품과 개인의 물건들은 작품 속 알레고리를 개인적인 것으로 변화시킨다. 벽면의 움푹 패인 공간, 나무상자, 이모티콘이 그려진 종이 장식물들은 그 자체로는 중요한 의미가 없다. 또한 그의 절제된 붓질이 내면 심리의 반영을 억제하기 때문에 이러한 낯선 사물들의 이미지 만으로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다.
물론 작업 속 대상들에 얽힌 작가의 경험이나 일화를 듣는다면 그것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경험과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회화의 감상에 있어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김성국의 회화는 작가의 경험을 토대로 하되, 관객에게 또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테라코타 외장 타일을 장식 패턴으로 뒤덮은 <국립 현대> 시리즈는 실제 외벽에는 존재하지 않는 패턴들을 통해 그 자체가 시각적 허구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영국의 인상주의 여성 화가 로라 나이트(Laura Knight)가 1913년에 제작한
를 차용한 는 회화예술과 일상의 차이를 붉은 천과 흰색 벽면의 대조와 질감의 대비를 통해 보여준다. 그 외에도 벽에 붙인 녹색 테이프 선들, 방음판, 작업실의 잡동사니는 작품 속 일상이 세트 위에서 재현된 것들임을 드러내는 장치들이다. 이처럼 회화 속의 일상이 진짜일 수 없음을 말하는 역설은 양부음술(apophasis)의 수사처럼 작가가 일상을 일상적인 것으로 다루지 않았다고 고백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그가 다룬 것이 일상임을 말해주는 듯하다.
벽감에 상체가 걸쳐진 채 하체를 늘어뜨린 남성과 그의 발을 받치고 있는 여성을 묘사한 는 통사적 방식, 다른 말로는 사전적 방식으로 재현요소들을 개인의 알레고리로 만든다. 이를테면 벽감에 걸려있는 남성은 자칫하면 바닥으로 떨어질 듯이 보인다. 이 때 회화를 통해 ‘걸려 있음’을 묘사하는 장면은 ‘위태로움’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 상태를 ‘받쳐주는’ 여성의 손은 ‘구원의 행위’이자 동시에 난국에 ‘함께 얽혀 있음’으로 해석될 수 있다. 기독교 미술과 불교미술의 제스처나 수인은 문화적 특수성에 기댄 알레고리인 반면, 김성국의 몇 몇 작업이 보여주는 인물의 구도와 동작의 의미는 직관적인 사고의 작동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
나는 김성국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스튜디오 안과 밖의 소재들을 통해 예술과 일상의 도치를 떠올린다. 이러한 반복은 점차 작가의 작업에 상호 교환되는 어휘적 지표들을 제공하고 있다. 새롭게 추가되는 단어처럼, 작업이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전체 작업은 새롭게 해석된다. 이들 작품들 사이에서 작동하는 레퍼런스는 전체 작품을 기호 체계로 만든다. 이 점에서 한 작품 안에서는 통사적으로 작동하던 해석이, 작품들 사이에서는 기호적인 것으로 확장된다. 작가는 꾸준히 어휘 목록을 늘려가고 있고, 언젠가 이렇게 한 쪽으로 증가해온 작가의 기호계는 그의 일상으로 역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손 끝에서 시작한 꽃의 물결이 바닥에 의해 잘리고, 청테이프로 비례를 측정해야만 연출되는 인위일지언정, 언젠가 회화가 그의 일상을 바꾸게 되는 희망으로 느껴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