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우리가 예술의 본질을 지식생산의 국면으로 파악하는 데 동의한다면, 예술작품의 생산, 그것도 회화라는 고전적인 방식의 행위를 통해서 예술가가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너무도 많은 ‘예술들’이 고유한 메커니즘 아래 작동하는 예술 시스템 속에서 의미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시장과 언론과 학교의 카르텔이 제조해내는 현대적인 예술들은 예술가의 사상과 의식과 감성을 언어게임의 논리에 귀속되고 있다. 삶을 깨치기도 전에 예술언어 게임의 논리를 체득할 수밖에 없는 오늘날 예술의 장 속에서, 나는 홍원석 같은 젊은 작가를 만나는 일이 참으로 반갑다.
홍원석은 밤과 차량을 그림으로써 현대사회 일상의 단면을 드러내는 작가이다. 일상담론이 제대로 된 창작과 비평으로 이어지기도 전에 매우 미적지근한 표현으로 전락해버린 우리 미술계에서, 홍원석 같은 젊은 작가가 일상을 내세우는 일은 일견 식상한 상투어로 들릴 위험마저 있다. 하여 나는 그에게 있어 일상이라는 것이 어떤 연유로 핵심적인 의제로 설정되었는지, 그리고 그가 어떻게 그 일상이라는 애매한 비평적 언술을 비상한 감성으로 시각화하고 있는지를 해명함으로써 홍원석이 바라보는 일상과 비일상의 함의를 헤아려보려고 한다.
홍원석이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해명하기 위해서 일상이나 풍경이라는 단어를 동원한다고 할지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관찰자 시점에서 도시를 파악한 관조의 결과가 아니라 구조적인 반복을 통해서 현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메커니즘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매우 차가운 비판적 리얼리즘의 시선으로 구조를 파고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삶의 체험으로부터 나온 따뜻한 감성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홍원석의 그림은 야간에 달리는 자동차가 등장하는 풍경만을 다룬다기보다는 그 풍경 속에 담긴 행위(자)의 정황을 다룬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달리는 자동차 자체이기 보다는 그가 체험한 야간운전이라는 행위가 함의하고 있는 정황이라는 뜻이다.
홍원석은 검푸른 하늘과 헤드라이트를 켠 자동차를 그리는 작가이다. 대부분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땅과 하늘은 어두운 밤의 그것이며, 어둠속을 질주하는 차량은 헤드라이트를 켜고 있다. 그의 푸른색은 깊고 짙은 어두움을 담은 푸른색이다. 홍원석은 그 속에 한줄기 빛을 던진다. 초기작 <야간배달>(2005년)은 그가 밤과 자동차를 그리는 이유와 방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충남 논산에서 나고 자란 그의 집은 한 때 식당을 운영했는데, 이때 경승용차나 트럭으로 음식을 배달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야간과 운전이라는 두 가지 주제에 관련한 체험을 얻었다. 푸른 배경에 단출하게 트럭 한 대를 그려넣은 이 작품은 눈에 보이는 대상을 옮겨 그린 것이 아니라 유년의 체험을 끌어낸 것이라는 점에서, 홍원석의 그림은 오늘날과 같이 다원화한 매체환경 속에서 회화의 의미있음을 매우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홍원석에게 있어서 운전은 아련한 추억이기도 하며 냉혹한 현실을 살아내는 실질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그는 유년시절 택시운전을 했던 그의 아버지로부터, 한때 가업으로 삼았던 식당의 배달 체험 이후, 20대에 접어들어서도 지금까지 운전대를 잡는 일을 자신의 부업으로 삼아왔다. 홍원석은 이러한 추억과 현실을 바탕으로 해서 철저하게 자기 체험으로부터 나오는 그림을 그린다. 이점을 나는 예술가의 진정성의 국면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자신이 경험한 것,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 자신이 절실하게 느낀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예술이다. 이러한 전제가 부재한 예술은 공허한 언어의 미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수많은 사이비 예술가들을 통해서 보아오지 않았던가. 뉴미디어의 화려한 수사들과 달리 회화는 몸의 언어로 자신의 체험과 기억을 재현해낸다는 점에서, 화가에게 있어서 체험은 진정성의 여부와 더욱 각별하게 직결한다.
그러나 배달의 기억만이 홍원석으로 하여금 이러한 작업을 만들도록 한 것은 아니다. 야간배달이라는 상황을 목격한 후 그것을 그림으로 옮겨낸 작가와 자신의 직접체험을 바탕으로 그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작품에 대한 이해의 국면은 분명 다른 층위를 가지고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작품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작가의 체험과 의도를 관통해야한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에게 있어 운전은 기억에서 멈추지 않고 현실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 따라서 홍원석은 과거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그리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그의 작품이 현실을 보다 전일적인 가치와 감성 체계 속에서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저변의 힘이다.
야간과 운전의 조합은 고요한 낭만에 그치지 않고 급박한 사건으로 치닫는다. 2005년에 그린 <버스>나 <진흙탕 야간운전>, <쌍라이트> 같은 작품들은 불안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어두운 밤길에 한줄기 노란 불빛이 사선으로 화면을 가르는 극적인 대비는 이후에 그가 다루는 비일상과 도발의 예고판과도 같다. 홍원석 내러티브는 1:3 비율의 가로 그림 <야간 구급차>(2006년) 이후에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군대에서 앰뷸런스 차량 운전병을 지냈던 그에게 있어 이렇듯 긴박하고 다급한 상황들은 일상이자 비일상이었다. 검푸른 하늘 아래 녹청색의 풀밭 사이에서 푸른 여름밤을 가르는 헤드라이트 불빛은 긴장을 넘어 역설적이게도 창백한 낭만을 부른다. 그것은 태백 탄광촌의 황재형이 그렸던 구급차와는 완연하게 다른 차원에서 젊은 작가의 날카로운 기억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해의 도시 풍경 <택시>는 화면의 왼쪽 위아래를 길게 가르는 도로 위에서 순행 차선을 넘어 역주행하는 차량들을 담고 있다. 삼성과 맥도널드 간판이 보이고, 도로 한가운데로 흘러내리는 불빛들 등 고만고만한 도시 풍경 속에서 거꾸로 달리는 자동차가 비상한 도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야간운전>연작 두 점은 비상구를 향해 열린 전면의 통로 앞에서 불안하게 서있는 자동차들과 지상으로 내려오는 낙하산들을 통해서 폭격, 테러, 습격 등과 같은 불안요소에 휩싸인 현대인의 삶을 은유하고 있다. 앰뷸런스 운전병으로서의 체험과 택시운전을 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오버랩된 작품이다. 구름과 난간의 구획으로 화면을 삼등분한 후 낙하산들과 자동차를 배치하는 솜씨도 눈에 쏙 들어온다. <낯선 손님>은 우주복을 입은 인물과 낙하산을 배치한 그림인데, <야간운전 II>와 한쌍을 이루도록 근경과 원경의 선을 맞춤으로써 현실 너머의 낯설고 이상한 것에 탐닉하는 그의 몽환취미를 드러내고 있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들은 밤, 자동차, 운전 등의 모티프에서 출발한 홍원석의 전작들을 변주한 작품들이다. <행복한 상상>이나 <만원의 행복>, <환상> 등은 예의 야간 자동차 배경에 풍선이나 돈, 로또번호 등과 같은 요소들을 가미해서 유년의 기억과 현실의 기원을 담고 있다. <슈웅~>이나 <코카콜라> 등과 같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수평구도를 변형한 작품들과 더불어, 강가에 우주인이 등장하고 말이 풀을 뜯고 있는가하면 교각 위에 차량이 지나가고 몽환적인 가로등 풍경이 이어지는 <낯선 여행>과 <낯선 만남>, <낯선 데이트> 등은 기존의 작품을 보다 풍부하게 해석하는 것인 동시에 향후 작품성향의 변모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다른 경향으로 긴박한 역주행을 그린
나 , <애완 보호> 같은 그림은 이 작가가 기억과 체험을 몽환으로만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현실인식으로 연결하고 있다는 점을 실감하게 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5년전에 한국사회를 들었다 놨던 2002년 유월에 대한 상황인식을 담은 그림 이다. 월드컵 게임이 열렸던 그 해, 온 나라가 축구공 하나로 열광과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사이에 미군의 장갑차에 치어 목숨을 잃은 효순이와 미선이 사건은 연말까지 묻혀 있었다. 차량이 질주하는 도로에는 차에 치어 내장이 터진 개가 있고, 하늘에는 축구공 애드벌룬과 붉은악마 티셔츠가 두둥실 떠있다. 홍원석은 이렇듯 정황을 담은 풍경을 통해서 일상 속에 내재한 비상한 사건의 잔혹함을 담아낸다. 그는 글로벌 스포츠마케팅과 국가주의의 위력 앞에서 동시대의 사건으로 인식되지 못했던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월드컵과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매스 미디어 시스템에 길들여진 대중의 현실 인식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고양이와 개가 죽어있는 모습을 애완보호라는 글씨가 적혀있는 연등과 함께 보여주는 그림 <애완 보호>도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차량 앞에서 고사를 지내고, 구급차, 택시, 트럭, 초상집 근조등, 주차금지 사인, 차에 치이는 강아지, 신호등, 우주인 등이 등장하는 <숲속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종합한 그림이다.
나는 홍원석의 그림이 무절제하게 쓰이는 일상담론에 휩쓸리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현실과 몽환의 세계를 평면회화로 드러내는 ‘예술운전사(art-driver)’로 표현하고 있는 홍원석은 일상 너머 비일상의 세계를 그린다. 홍원석이 도달하고자하는 세계는 비록 그 출발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일지라도 일상 그 이상의 것이다. 그는 일상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 비일상의 세계를 갈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상의 체험을 일탈의 세계로 전이하는 과정이기도 하고, 현실에 대한 인식을 넘어 몽환의 세계로 넘김으로써 역설적으로 기억과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홍원석이 일상을 그리면서도 일상담론에 안주하지 않는 일탈의 내러티브를 형성하는 이유이다. 일탈의 내러티브야말로 우리가 예술로부터 기대하는 강렬한 희망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