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ARTS

  • 작가명 : 김인영, steel  Enamel paint 100 x 100cm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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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평론
글. 이선영(미술평론가)

철판 위를 여러 각도로 가로지르는 찐득한 에나멜 물감이 만들어내는 주름들은 오래된 자연 또는 인공 구조물의 주름들과 부딪히면서도 어우러진다. 김인영의 작품에서는 재료의 물성과 풍경의 요소가 동형적 구조를 이루면서 미지의 공간이 생성된다. 이러한 미지의 공간은 현실적 참조대상과 관련되면서도 회화적이다. 장중하면서도 섬세한 디테일이 살아있는 화면들은 작가에게 감흥을 주었던 세계 여행을 시시콜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행에 상응할만한 것을 회화라는 또 다른 어법으로 번역한다. 관객은 회화가 만들어내는 겹겹의 층을 여행하면서 작가가 새겨 넣었을 미지의 시공간을 체험하게 된다. 여행은 두고두고 다시 펼쳐낼 수 있는 황홀한 만남을 고동치는 심장과 주름 진 뇌에 새겨 넣었을 것이다. 여행에서 촉발되었고, 여행을 촉구하는 공간들은 유동적이다. 공간은 고착되어 있지 않고 무너져 내리거나 생성중이다.
한 화면에는 겹겹이 그려지고 칠해지고 흘러내린 공간이 있는가하면 텅 빈 공간도 있다. 회화의 물성과 참조대상으로부터 연원한 환영이 동시에 작동되면서 만들어진 풍경 속 원근감은 뒤죽박죽이다. 앞뒤나 상하가 바뀌는 일도 흔하다. 공간은 시간의 질서만큼이나 불확정적이다. 이러한 비균질적인 공간에는 잠재적인 흐름이 있다. 공간은 연속적으로 생성되고 증식되는 유동성을 가진다. 흐름에 내재된 시간성은 서사 또한 포함한다. 이야기는 한창 진행 중이지만, 사전에 정해진 기승전결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이번 전시 역시 이전작품처럼 공간 구축에 주력하지만, 동서양의 오래된 건축적 구조물이 들어가 있는 점이 다르다. 작품 속에 단편적으로 들어가 있는 건축적 구조물은 에나멜 물감에서 생겨난 마블링처럼 오랜 시공간의 켜를 둘러쓰고 있다. 2층 전시장에 걸린 실크 스크린 작품 역시 여러 시공간의 층을 중첩시킨다.
철판이건 실크 스크린이건, 이미지들은 유기적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단편들이 중첩된 집합이다. 단편은 어떤 전체에서 떨어져 나온 우연적 파편이 아니라, 또 다른 이질적 단편과 만나는 단위로 작동한다. 매끈하지 않은 외곽선들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해안선처럼 이접의 접면을 늘려나간다. 바위를 깍아 만든 동양의 고대 신전이나 서양의 고딕 석조물은 공간적 구조의 복잡함에 오랜 시간의 층들이 합세해, 비록 부분일지라도 장중한 존재감을 잃지 않는다. 이러한 고색창연한 풍경 위나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에나멜 물감은 생경하다. 출고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철판 위를 흐르는 번질거리는 물감은 표면성과 인공성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곧 녹슬 철판, 그리고 마블링 효과 및 방향성을 가진 흐름이 있는 에나멜 물감에도 작품 소재로 들어온 오래된 건축물만큼의 퇴적층이 존재한다. 밑판이나 물감에도 깊이가 있지만, 그것은 표면들이 만들어내는 깊이 이다.
그러나 작품 소재로 들어온 유적지 또한 표면적이지 않을까. 그것들은 그곳에 수 백 년 이상 존재하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지나가는 여행자에 의해 포착된 장면이며 인상이다. 작가는 결코 건축적 소재 전체를 들여오지 않는다. 관객 또한 물감의 궤적과 형상이 얽혀 있는 장면을 통해 상상력이 촉발되는 것이지, 기시감을 확인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 전시에서 캔버스를 철로 바꾼 것은 에나멜 물감과의 어울림 뿐 아니라, 화면의 두께가 1-1.5mm 정도로 얇아진다는 것에서 왔다. 쇠판은 시간의 흐름을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이면서 물질적 깊이를 만들어 낼 것이다. 깊이는 얇은 층들이 집적되면서 만들어진다. 철판 위를 경쾌하게 미끌어지면서 만들어지는 복잡한 층은 이 시대 사물의 양상을 반영한다. 디지털 시대의 사물은 아나로그 시대의 사물과 달리, 그 기능이 표면에 배열되어 있다. 접촉에 의해 연속적으로 열리는 공간들은, 최대한 얇은 공간 속에 정보를 집적, 또는 압축시키는 첨단기술의 산물이다.
오래된 자연이나 인공물을 표현하기 위해 그만큼의 물감을 화면 위에 쌓아가는 방식이 있는가하면, 김인영처럼 최대한 활성화된 표면 속에 깊이를 새겨 넣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그녀의 방식은 매끈한 공간을 활주하는 경쾌함과 존재의 무게감(또는 깊이감)을 공존하게 한다. 물감은 평면을 자유롭게 활주하지만, 작품 [연속적 생성]처럼 보이지 않는 건축적 구조를 타고 흘러내리기도 한다. 2층에 걸린 5개의 실크 스크린 작품 [겹쳐진 잔존물]은 문명의 흔적과 잔해들을 얇게 겹쳐놓는다. 그것들은 고대의 겹쳐 쓰여 진 양피지처럼 오래되고 낡은 느낌을 주지만, 실크 망을 뚫어서 밀리는 효과 때문에 얇은 느낌이 남아 있다. 얇으면 시공간의 주름잡기는 더욱 용이하며, 내용물은 최대한 많이 겹쳐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반투명한 효과는 각 층위에 바람을 통하게 한다. 그래서 중첩된 이미지들은 밀봉된 채 한데 뭉개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새로운 상황 속에서 되살려질 씨앗 같은 잠재성을 지닌다.
건축의 단편은 마치 탁본처럼 실제의 일부이면서 떠내어지지 않은 다른 부분을 상상하게 한다. 김인영의 작품에서 구조란 생물학적 차원 또한 포함한다. 생체의 일부로부터 추출된 유전자가 유기체를 복원할 가능성이 열린 생물공학의 시대에, 단편은 단순한 파편이 아니라 전체를 내장한다. 그것은 줄기세포처럼 무엇으로도 성장할 수 있으며, 꿈속에 등장하는 단편처럼 무엇으로 이어질지 예측 불가능한 지형도를 가진다. 작업방식 또한 대략적인 계획은 있지만, 결정 불가능한 요소들이 산재해 있다. 불안정함은 불완전함이 아니라, 운동의 동인이 된다. 작품 [연속적 생성]은 위아래로 긴 고딕양식에 맞는 긴 화면이 특징적인데, 중첩된 공간을 가로지르며 줄줄 흘러내리는 물감이 천상을 향해 비상하는 구조와 공존한다. 실크 스크린 작품 [layered remnants] 역시 위아래로 길쭉한 화면에 건축 구조들이 위에 둥 떠서 중첩되어 있는 극도의 불안정성을 보여준다.
건축구조물은 지상에 단단히 뿌리 내리지 않고 부표처럼 떠 있다. 표면성은 중력의 감각을 조정함으로서도 이루어진다. 매끈한 판 위에 모아놓은 시공간의 단편들이 조합되는 방식은 열려 있으며, 일정한 크기의 판을 넘어서 확장해나간다. 김인영의 작품은 창을 넘어 장으로 까지 확장되는 현대미술의 흐름에 비추어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는 화면들이지만, 각 작품들은 기념비적 스케일을 유지한다. 화면 여기저기에 남겨놓은 빈 공간은 새로운 형태가 발생하고 전개되며 소멸하는 장이다. 철판 중간에 배치된 산 같은 구조와 화산 분출 물 같은 솟아오름이 있는 작품 [연속적 생성]은 변화무쌍한 자연 현상과 유동적 물감 층의 교차가 있다. 작품 [betweenness]은 어두운 배경 속에서 바다 아래로 녹아내리는 빙하 덩어리 같은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줄지은 동굴같이 생겨난 공간이 오래된 문화유적을 닮았다. 회오리 같은 색의 층이 떠있는 작품 [hole]은 빈 구멍이 생성, 또는 소멸의 장이 될 수 있음을 예시한다.
대상의 고정을 통한 소유를 욕망하는 재현주의에서는 불확실성과 유동성을 야기하는 이러한 허공이 억압된다. 반면 김인영은 재현하지 않고 제시한다. 작품 [inbetween]에서 서로 다른 질감을 가진 구조물이 맞부딪히는 장은 빈 공간이다. 김인영의 작품에서 암벽인지 건축물인지 알 수 없는 구조들은 자연화 된 역사를 보여준다. 시간의 흐름 속에 놓여 진 인공적 구조물이 도입된 이번 전시에서 공간의 구축은 공간의 생성과 전개, 그리고 소멸에 방점이 찍혀진다. 김인영의 작품에서 공간은 고전주의에서처럼 하나의 절대적 실재가 아니라, 구성과 해체의 결과이다. 여기저기에서 발췌한 표상의 파편들은 여러 시공간의 공존을 예시한다. 시공간의 공존에 내재된 경계의 불확실함은 아카데미의 고전적 원근법에 전제된, 세계를 총체적으로 표상하려는 야심과는 거리가 멀다. 미술을 우주적 질서를 이해하는 가장 훌륭한 도구로 여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말년에 이르러, 무한한 움직임으로 가득한 자연을 재발견했듯이, 자연이나 자연화 된 역사는 인공적 틀 속에 끼워 맞출 수 없는 것이다.
거기에는 한계에 충실한 미보다는 경계의 소멸을 지향하는 낭만적 숭고가 있다. 복잡한 외곽선을 지닌 공간적 다양성이 시간적 차이를 두고 중첩된 화면에는 끝없는 움직임이 잠재해 있다. 폐허 같은 오래된 유적지는 그자체가 덧없는 시간의 흐름이 야기하는 변형의 장이다. 물감의 궤적 또한 작가의 행위에 실린 시간의 흐름을 기록한다. 거기서는 낭만적 폐허와 회화성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김인영의 작품에는 감상적이면서도 무한한 낭만적 풍경이 있지만, 자연과 인간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이전 시대의 총체적 세계관을 공유하지 않는다. 단편들은 중첩될 뿐이지 퍼즐처럼 끼워 맞춰져 온전한 하나를 형성하지 않는다. 세계가 온통 절대시된 주체의 정서로 물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중심과 주변의 관계 또한 다르게 설정된다. 그것이 제안하는 여행은 중심을 향한 전진이 아니라, 배회에 가깝다. 이러한 배회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중심을 상정하는 상징주의가 아니라, 기표와 기의 간의 거리가 무한히 벌어져 있는 알레고리이다.
떠도는 여행이라는 비유는, 완전히 제어되지 않는 물감의 흐름이 김인영의 작품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해 볼 때 분명하다. 배회는 전진과 달리, 본질과 핵심, 그리고 실체를 향한 침투가 아니다. 배회는 깊이가 아닌 표면에서 이루어진다. 표면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부피가 유한할지 모르지만 끝이 있을 수 없다. 작가는 이번전시에서 캔버스가 아닌 철판이라는 매체를 의도적으로 선택함으로서, 표면을 더욱 강조한다. 캔버스에 수행했던 이전작업이 공간을 구축하는데 방점이 찍혀있었다면, 중심과 주변의 관계가 모호해진 표면의 세계를 여행하려는 이번 전시에서, 공간은 시간에 잠식되어 불투명해 진다. 불투명성은 예술과 대비되는 사물의 특징이다. 오래된 유적지는 그러한 물성을 대변하는 소재이다. 시간이 개입될 틈 없이 단번에 포착될 수 있는 명료한 공간적 관계성을 전제하는 모더니즘 미학은 불확실한 상황 속 지각의 흐름으로 와해된다.
김인영이 만났던 세계의 유적지들은 미술책에도 등재되어 있는 기념비들이긴 하지만, 결코 근대적 의미의 ‘예술작품’은 아니다. 그것들은 그 구조와 의미가 명확히 부여된 예술작품이라기 보다는, 지각과 기억이 상호 침투된 몸의 현존성을 고양시키는 연극적 장치들인 셈이다. 연극성은 장소특정적인 설치를 통해 이루어지곤 하지만 김인영은 회화를 통해서 연극성에 상응하는 연출을 시도했다. 주된 장치는 간격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간격들은 소통 불가능함과 공통성 없음을 나타낸다. 그녀의 작품에서 시간적 공간적 간격은 얼버무려지지 않고 최대한 드러난다. 작가는 간격으로부터 무엇인가 발생한다는 것을 감지한다. 반면 자율적이며 자족적 전체는 간격을 억압한다. 논리적 이성은 자신이 임의적으로 설정했을 뿐인 완벽한 구도 하에 잃어버린 고리가 채워지기를 촉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인영의 작품에서 단편들은, 그것들이 비록 덩치 큰 인류의 기념비들로부터 온 것들이지만, 잃어버린 통일성이나 전체성을 복구, 복원하기 위한 단편이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단편과 만나 미지의 것을 형성하기 위한 단초로서의 단편, 즉 잃어버린 고리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과 발단이다. 하나의 덩어리란 그것이 어떤 선험적 또는 추후에 획득될 조화에 기반 해 있던지 간에, 지금은 굼뜬 이데올로기로 다가 올 따름이다. 밀가루 덩어리는 수없이 치대어지고 부풀려져 수많은 겹을 가진 파이로 재탄생할 수도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유(有)의 겹을 늘림으로서 표면을 확장하는 것이 필요한 시대이다. 표면 혹은 중층적인 표면의 시대에 깊이를 파기보다는 표면을 넓히는 것에 더 큰 창조력이 들어간다. 인간에게 주어진 것들은 비록 한정된 것일지라도 거기에는 무수한 겹과 주름을 부여할 수 있다. 자연 및 시간의 시험대에 놓인 인간 역사가 낱낱이 남겨놓은 흔적을 따라, 작가 또한 작품을 통해서 그러한 무수한 시공간을 압축 재생할 수 있다. 김인영이 그러한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공간의 확장은 결과적으로 진정 여행할만한 다원적 세계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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