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가야 달맞이 가자.
어린아이는 동, 서양의 영원한 철학적, 문학적 영감의 원천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어린이를 우리의 스승으로 부르고 싶다 했으며, 가스통 바슐라르는 어린시절을 향한 몽상은 근본적 이미지들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했다. 불경의 정수인 화엄경에서는 선재동자를 드러내 지혜를 찾아나서는 구도행의 표본으로 삼고 있다. 이처럼 아이의 세계는 철학, 종교, 문학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는 이상계의 모범으로써 은유되고 있다.
박대조가 작업하는 세상의 아이들 또한 어린아이의 동심에서 출발하고 있다. 작가는 어린이에게서 절대적인 미를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노자(老子)는 도(道)의 상태를 무위(無爲)이고 자연(自然)이라 하였는데, 그 도를 보는 마음을 현람(玄覽, 통찰력을 지닌 지각 또는 거울)이라 했다. 그 현람을 노자는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라 하였는데, 이러한 자연에 합치되는 아이의 본성은 박대조에게 감정이입의 대상으로서 조형화된다. 그의 아이들은 고발적이고 폭로하는 성숙한 아이로써 재탄생되고 있다. 세계의 본질을 관조하는 오묘한 거울로서의 아이의 눈은 인간의 욕망으로 빚어지는 재앙과 공포를 응시한다.
아이의 동공 속에 입혀진 전쟁, 지진, 기아와 같은 인류의 대재앙들은 아이의 웃음, 아름다움, 자연, 생명을 위협하는 문명의 잔인한 폐해들로 드러난다. 사실, 그의 작품은 “동자(童子)란 사람의 처음이고, 동심은 마음의 처음이다. 동심(童心)이란 진심(眞心)인데, 세상이 혼탁한 것은 다욕(多欲)으로 인한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이 근원이다”라고 말하는 이탁오(李卓吾)의 <<분서(焚書)>>에서 그 철학적 내용과 상응되고 있다. 그 욕망이 불러온 진상을 눈에 넣은 아이들은 현대를 증명하는 아이, 그 실체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거울로서의 어린아이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인류가 저질러 온 총체적인 위기와 난관에 관한 증거이자 경고이며, 강한 어조의 고발인 것이다.
티없이 맑고 작은 아이들의 세계는 작가의 화면에서 거침없이 드러난다. 아가야 나오너라의 홍난파의 달맞이 동요가 흐르는 듯하다. 온통 이 세상이 아이들의 웃음과 아이들의 희망으로 가득한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아이는 작가가 희구하는 세계의 본질이며, 이상계를 대표하는 하나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근작들에게 보여주는 염원이나 human & city 시리즈에서는 종교적으로 승화된 아이들과 성스러운 힌두교, 불교의 발원지라 불리는 성산(聖山) 카일리쉬가 있는 히말라야의 자연을 직접적으로 담아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작가가 희구하는 세계의 구체화된 모습들을 찾아 나서고, 이를 화면으로 제시하고 이해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그러나 박대조는 이상계의 형상화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가 현상계를 증명하고 이상계의 본질로 드러낸 어린아이들은 정신이 이미 훌쩍 커버린 어른아이들이며, 이들은 고독하고 슬프다. 그가 이상계로써 새롭게 만난 네팔의 아이들조차 그들의 검은 빛 눈동자에는 문명을 관조하는 슬픔과 고독이 들어 있다. 따라서 아이로 은유하는 기쁨과 순수는 욕망과 파괴와 대립되고 있다. 작가의 대립과 화해는 화강암에 사진을 음각하는 작업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돌이 물의 근원, 생명의 근원과 같은 영원성과 자연의 대표물이라면, 사진은 영원에 대립하는 순간성과 현대문명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