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들은 개인적인 의미가 많이 담긴 작업이다. 오랜 친구가 결혼을 한다기에 뜻있는 선물을 하고 싶어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작업에 한참 몰입하던 중, 이 작업이 나에게 의미 있는 부분을 잘 전달해 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친구에게는 다른 선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이 작업을 계속 더 다듬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작업의 의미
사람을 만날 때 처음 갖게 되는 이미지가 있다. 보통 '첫인상'이라는 말이 있고, 좀 부정적인 의미로 '선입견'이라는 뜻도 있다. 어떤 이는 자신이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한 인상이 거의 끝까지 간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은 직관이 강한 것인지......내 경우엔 대부분이 처음의 이미지와 많은 차이를 보게 되는 것 같다. 어떤 이는 강해 보이는데 속이 참 여린 이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날아갈 듣ㅅ 연약해 보이는데 알면 알수록 장군감인 경우도 있다. 이렇게 강하거나, 약한 혹은 여린 이미지로 단번에 드러나는 경우에서도 그렇거니와, 보다 복잡한 이미지를 갖는 이를 만나는 경우에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들의 첫인상은 점차 다른 모습이 되어간다.
식물의 의미
몇 년 혹은 몇 십년을 식물인간인체로 지내다 기적적으로 깨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정말 놀랍기 그지없다.
"난 끊임없이 여길 봐달라고 외쳤어요."
"난 살아있어요. 내 마음은 모든 걸 느낄 수 있어요."
식물인간의 가족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수도 없이 환자에 대해서 포기할 것을 권유 받는다고 했다. 살아있는 상황에서 자기를 포기할 것을 권유받는 가족의 모습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것인가? 그저 움직이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할 뿐인 그들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사람처럼 섬세한 감정이 없을 것이라 여기는 동물들은 어떠한가? 움직임마저 보이지 않는 식물에 대해선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인가? 감정이 없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식물, 꽃, 나무. 이런 것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었나 보다. 눈앞에서 재롱부리는 강아지나 고양이는 먹이도 주고 예뻐하며 살아있는 것으로 여기면서, 길가의 잡초나 꽃과 나무는 생물임을 알면서도 살아있는 생명임을 망각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빠른 움직임이 없어서였을까? 예쁜 꽃이 피어있으면 아무 생각 없이 꺾기도 하고, '밟지마시오'란 푯말이 없으면 거리낌 없이 풀밭을 밟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보살피고 존중하고자 하는 어떤 태도와 계속해서 함께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화초를 잘 가꾸시는 분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화분과 마당의 나무를 잘 보살피시고, 심지어 지인들이 죽은 화분이라며 가져온 꽃나무를 다시 살려내시기도 한다.
지금은 나이가 많이 드셔서 거동이 불편하심에도 늘 새벽에 일어나서 그 많은 화초에 물을 주신다. 힘드시지 않느냐고 여쭈면, 그래야 아이들이 좋아하고 건강하게 잘 자란다고 말씀하신다. 또, 가끔 화분에 말을 건네기도 하신다.
"잘 자고 일어났지?"
"활짝 웃는걸 보니 기분이 좋은가 보네"
애완동물을 넘어 자식 대하듯이 화분에게 말을 거는 어머니가 어린 시절엔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난 아직도 어머니처럼 그들을 온전한 생명으로 느끼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머니의 이런 태도가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현재의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날 눈에 들어온 식물이 있었다. 식충식물. 벌레잡이통풀. 끈끈이 주걱...... 분명히 식물로 분류되는 이들은 주머니나 촉수처럼 뻗은 몸을 하고, 곤충을 자신들의 소화액으로 녹여 영양분을 섭취해 살아가는데 그 과정이 흡사, 동물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들의 형태로부터 출발하여 뿌리식물, 구근식물 등의 이미지를 이용한 작업이 시작되었고, 식물의 잎사귀, 덩어리진 뿌리, 줄기, 꽃의 몸통들은 분리되고 서로 조합되면서 식충식물이 가진 양면성이, 식물의 요소가 조합된 동물성으로 전환된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철사의 사용과 뜨개질 기법
살아있지 않은, 인공적인 재료와 기법이 필요했다. 살아있는 생명의 형태를 역설적으로 부각시켜줄 재료가 있을까? 친구에게 선물하려했던 철사작업이 제격인듯 싶었다. 철이라는 소재는 우선 강한 느낌이 든다. 쉽게 구부리기 힘들 것 같은데, 의외로 조금 힘을 주어 구부리면 원하는 형태가 나온다. 생각보다 유연한 이 철사를 어떤 방법으로 엮어나갈 것인가? 이전 작업 중에 짐승의 털 느낌을 살리기 위해 털실로 짠 사람 정도 크기의 '못' 작업이 생각났다. 철사도 실이 떠지듯이 떠지는지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뜨개질이라니... 아기자기한 느낌마저 든다. 정말 옷을 뜨듯이 촘촘히 떠지지는 않지만, 뜨개질의 형태를 보여줄 만 했다. 더구나,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기분과 상황에 따라 어느 정도 다양하게 변화된 설치가 가능하다.
이렇게 내 작업은 하나의 성격이 또 다른 성격과의 계속적인 만남을 시도한다. 생명을 갖은 식물이 강하고 단단한 철(철사)과 만나고, 이 철은 다시 유연성이 드러나는 뜨개질 기법으로 연장된다. 줄기, 뿌리, 잎사귀 등의 식물의 요소는 이러한 뜨개질 기법을 통해 정적인 이미지로부터 동물성의 동적인 이미지를 드러나게 한다. 이런 모든 과정은 나 자신이 타인이나, 처음 접하게 되는 모든 존재에 대한 이해의 욕구인 듯싶기도 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인색했던 어떤 '것' 들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모르는 부분을 만났을 때, 사전을 찾고 분석을 통해 긍정이든 부정이든 결론을 짓는 이해의 방법도 있겠지만, 그 모르는 부분에 괄호치기나 잠시 밑줄을 그어두고 다음단락으로 넘어가듯 시간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보는 건 어떨까?
처음 그를 만난 날부터 오늘까지, 혹은 눈감는 날까지가 그의 참 모습임을 이해하면서 많은 다른 모습도 알아가고 싶다. 그래야 이제 안다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