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인큐베이터
- 전시개요
- 유근택의 <맹인을 이끄는 맹인/1999>을 예로 이야기를 풀어 가겠다.
그는 10m X 3.4m에 이르는 그 대작을, 피터 브뤼겔(1525-1569)의 <맹인의 우화 The Parable of the Blind/1568>에서 영감을 받고 그렸다는데, 브뤼겔은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렁에 빠진다’라는 구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동행’의 작가들은 ‘맹인을 이끄는 광인(狂人)’이 돼주기를 바란다. 윌리엄 세익스피어(1564-1616)의 <리어왕 King lear/1608>을 보면 리어왕 외에도 글로스터라는 불행한 사내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자신의 서자가 상속권이 없다는 사실에 분개하여 적자인 에드거를 모함한 것을 그대로 믿고 냉정하게 적자를 쫓아내며, 추후 서자에게 배신을 당해 리어왕의 둘째 사위에게 두 눈을 뽑혀 맹인이 되는 처벌을 받는다. 그 뒤 글로스터는 눈이 멀어 황야를 방황하다가 벌거숭이 광인 톰을 만나게 되는데, 그간 자신의 과오에 대해 뉘우치게 된 글로스터는 에드거에게 했던 것과는 달리 톰에게는 자비심을 베풀어 옷을 구해 입히고 길 안내자로 삼는다. 하지만 톰은 바로 광인으로 위장한 애드거였으며, 눈 먼 글로스터는 그리워하던 아들을 만나고서도 정작 알아보지 못 하면서, 여행길에 문득 ‘목소리가 바뀌고 이전보다 더 나은 내용과 말투로 얘기하는 것 같다’는 인식을 드러낸다. 하지만 눈이 있을 때에도 진실을 보지 못했던 눈 먼 글로스터에게 에드거는, “현혹 되신 거지요, 제 옷을 제외하곤 변한 게 없는데요(리어왕/민음사/1997/P150).”라는 의미심장한 대답을 하는데, 유근택에 대한 분석을 하다말고 뚱딴지처럼 갑자기 에드거의 대사를 비중 있게 거론하는 것은, 그가 귀족의 옷에서 벌거숭이 광인이 되었다가 다시 누추한 서민의 옷을 걸치게 되었더라도 언제나 한결 같은 마음의 에드거였듯이, 그것이 고구려 벽화의 채색이 됐건 고려 불화가 됐건 조선 문인화의 수묵이 됐건, 그 외형의 문제에 종속되는 것은 눈을 뜨고도 진실을 볼 수 없었던 글로스터와 같은 맹인과 마찬가지라는 의미이며, 고구려와 고려와 조선을 이어가며 누차 옷을 갈아입었던 그 사람들의 역사적인 지향점이 결국 무엇인지를 사유할 수 있는 ‘안목;이 정작 중요하다는 요지이다.
따라서 ‘동행’은 실학의 용어 규정에서부터 문제제기를 시작하여, 시간성이라는 단순 규정에 의해 임의로 동일한 범주에 속박된 실학자들 중에서, 민중 지향적 연구와 실천을 추구했던 선학들을 분리해서 조명할 것을 제안한다. ‘역사적 사실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사실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그 사실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자신의 해석에 따라 재구성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이다’는 명제를 적용하여, 실학이라는 규정적 용어에 속박되어 있는 18세기 조선 사상사에서 <민학 民學>이라는 별도의 용어를 추출해 보고자 한다.
[이조 후기의 신학풍은 천관우씨에게 이미 ‘실학’이 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씨는 과거 선학들의 호칭을 그대로 답습하여 ‘실학’으로 불렀다. 이와 같이 이미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 그 학풍을 부루는 데 있어서 씨는 새로운 이유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중략) 즉 오늘에 있어서의 가치나 의의와는 상관없이 역사상에 있어서의 학문 그 자체의 특징을 가지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미 현실성이 상실된 학문, 다만 역사상의 그것을 논하는 것으로 되었으니, 자연 그 명칭의 부여가 간단히 타결될 리 없는 것이다. 천관우씨의 견해에 대하여 진작 반론을 펴고 나온 이는 한우근씨다. 한우근씨는 <성호 이익 연구>의 일련의 논문을 육속 발표하며 <이조 후기의 사회와 사상/을유문화사.1961> 속에 일괄하여 실리고 그 끝에 <이조 실학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1편의 논문을 첨부하여 실학 명칭의 타당성 여부를 논하였다. 그는 주로 실학이라는 용어가 역사상(고려말부터 이조후기까지)에서 어떻게 씌어 왔느나를 살피고 결론으로 실학은 고려말부터 이조 일대를 통하여 우리 선인들이 주자학을 지칭했던 말이며, 따라서 이조 후기의 신학풍 그것을 특별히 실학으로 부를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일본 동아시아 실학연구회 주최 국제학술회의/이우성/1994.10
이후 벽사 이우성은 ‘고려 말부터 이조 일대에 걸쳐 경학 내지 성리학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 것을, ‘이조 후기의 신학풍’과 동일한 용어로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며 한근우의 논리의 설득력을 인정한다. 하지만 후세에서 그것을 실학으로 이름 붙인 것은 실학의 용례를 몰랐을 리 없는 국학의 종장들이었으며, 그들이 예의 신학풍을 특별히 ‘실학;이라고 한 것은 문자 그대로 현실성을 가진 학문이라는 의미에서였기에 그 또한 설득력이 있다고도 인정함으로서, 외형적으로는 천관우의 ‘실학’ 명칭에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실학을 ‘현실성이 상실된 학문’으로 예단한 천관우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확고히 드러낸다. 이는 실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중국이나 일본 등지에서도 시대별로 다양하게 사용되어 왔던 ‘보통 명사’의 성격에 가까운 것으로서, 18세기 조선의 특정 사상을 규정하기에 적절한 용어는 아니라는 인정임과 동시에 당대 지성들의 문제제기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근본적인 해결을 보지 못한 상황임으로, 실학의 실효성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의미이기에 작금의 현실에 좀 더 걸 맞는 ‘고유 명사’로서 본고는 <민학>이라는 용어를 익히 제안했던 바이다. 실학 외에 ‘국어’와 마찬가지 개념으로 ‘국학’이라는 용어 속에 실학이 포함되어 논의되기도 하나, 우리의 역사로부터 시작했지만 앞으로는 주변 여러 나라의 국민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특정 국적상의 연고를 제거한 ‘민학’이며, ‘국어’ 또한 본래는 <훈민정음 訓民正音>이라는 명칭으로 시작되었기에 그 줄인 말인 ‘민음’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계보사적 근거도 충실하다.
[이조 문명을 상징한 것은 실로 ,훈민정음>이니, 세계 문자 위에 뛰어나는 실용적 이기(利器)인 점에서 이것이 어찌 신라 예술의 걸작인 석굴암이나, 또는 고려 불교의 절정인 장경판에 비할 바이랴! 모든 역사적 유물이 거의 다 골동화 하여버린 오늘날에 와서 갈수록 새생명을 번쩍이고 있는 것은 오직 이 <훈민정음> 뿐이다. 한국이 이로부터 새 문명을 창건하는 데는 반드시 이 이기에 힘입는 바가 많을 것이다. 한국인은 현대 진운에 낙오자이나, 이 문명적 이기를 가졌으므로 노력 여하에 따라 낙오자를 면할 수 있고, 한국인은 거의 그 전부가 빈궁자이나, 이 민족적 지보를 가졌으므로 어느 의미에서는 빈궁자가 아니다. (중략) 과거의 한국인이 현재의 문명을 지은 것과 같이 현재의 한국인이 미래의 문명을 짓고 있다. 다만 과거에는 소수인에 의하여 그것을 짓게 되고, 현재에는 다수인에 의하여 그것을 짓게 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소수인에 의하여 지은 문명은 귀족 문명이요, 다수인에 의하여 지은 문명은 민중 문명이다. 전자의 특징이 이상적인 데 있다면, 후자의 특징은 실제적인 데 있다.
이는 벌써 이조 문명이 신라, 고려보다 실용적 색체를 짙게 띠고 있는 만큼 미래의 민중 문명을 암시 혹은 배태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은 <훈민정음>이다. <훈민>이란 어의는 곧 민중의 훈육을 의미한 것이 아닌가!
-한국의 문화/문일평/호암전집 제 2권 문화풍속편/조선일보사 출판부/1939
즉, ‘민음’을 사용하여 ‘민학’을 연구해온 이 나라의 정체성 자체가, 전통적으로 민중을 위한 나라였음을 전세계에 천명하는 계기로 작용되며, 서구 자본주의와는 확연히 차별화된 사상과 중국의 규모 위주의 경제가 극복할 수 없는 한계에 대한 대안으로서 근역(槿域)을 확장하자는 취지이다. 이는 또한 앞서 18세기 실학이 1930년대 상황에 시사해주는 바를 모색했던 위당 정인보와 민세 안재홍의 연구의 계승으로서, “그들이 생각하는 학문의 주체성은 ‘민중에게서 자극받아 나타난 진실의 학문’에 근거하며, 그들이 학문의 주체성을 회복하여 다시 되찾으려고 했던 주권은 바로 ‘민중을 위한 것’이다”라는 인식의 연장이다. 또한 ‘역사적 유물이 거의 다 골동화 하여버린 오늘날에 와서 갈수록 새 생명을 번쩍이고 있는 것’으로 호암 문일평이 조명했던 ‘민음’외에 ‘민학’을 추가함으로써, 일찍이 천관우에 의해 실효성이 상실되 ㄴ학문으로 규정되었던 것에 벽사가 ‘실학’이라는 용어를 고집함으로서 반박했던 진정성까지 충분히 포용할 수 있다. 안재홍의 호가 민세(民世)인 것이 우연이 아니며 그가 ‘민세주의’를 주창했던 것 또한 ‘나를 따르라’는 교조주의적 선동이 아니었고, 그것은 ‘민족주의가 침략적인 제국주의가 되지 않는 한 결코 부정하거나 말살할 이유가 없는 정당한 것이라고 변호’였으며, 아울러 ‘각 민족은 저마다 자기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면서 상호 공존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민족과 세계가 교호하는 민족적 국제주의-국제적 민족주의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열전/박찬승/돌배개/2003/P334)’의 추구가 역사진보의 자연스러운 흐림이었다는 선언이었다.
따라서 선학들의 지적인 정통성을 전승하는 미술 작업으로서의 의미로,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개념으로서의 <민화 民畵>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그 범주에는 기존의 조선 서민 생활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던 계층 분리적 미술의 개념을 초월하여, 공재의 풍속화와 더불어 ‘선비는 아래로 농부나 공인과 나란하다’라는 연암의 <원사> 개념에 투영되어 있는 계급 타파적 평등주의를 아울러서, 암울했던 80년대에 만개한 바 있던 민중미술의 역사까지 모두 포함하는 계보사적 통합을 지향하고자 한다. 국가와 국민이라는 개념이 근대주의 이후에 추출된 역사적 산물임을 부정할 수 없듯이, ‘한국화’라는 개념 또한 근대적 사고의 작용에 의한 것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며, 따라서 한국화의 전통을 재료의 차원에서 역추적 하여 멀리 ‘고구려 벽화’나 ‘터어키의 차탈휘위크 유적’을 지나 ‘에덴동산에 새겨진 아담의 낙서’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게 아니라, 한국화의 전통을 미래지향적 사상의 차원에서 접근하여 전근대의 영역에서 근대의 지층과 가장 직면해 있었던 시대의 추구 중, 우리 시대에 여전히 실효성이 남아 있으나 서구 편향의 근대적 사고에 의하여 부당하게 폄훼돼온 것들을 우선적으로 회복시키는 것으로부터 규정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민족과 인류가 가장 험난한 고비를 넘는 오늘날 우리 앞에는 과거와는 전혀 그 각도를 달리하는 고민과 과제가 놓여 있으니 이 고민과 과제를 해결하고 이 계레의 활로를 개척함에는 선인(先人)들의 체험과 아울러 새롭고 넓고 깊은 세계적인 사고가 요청된다. <사상>은 실로 이런 역사적 사명을 느껴 나서게 되는 바이므로, 그 편집에 있어서도 특히 연구적이며 이념적인 것에 치중했다”는 장준하의 주장에서부터 시작하여, “멀리 신라나 고려 때의 것은 오히려 현재의 우리들과는 생활이나 습관이나 풍속으로서는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심리상으로도 우리가 작품을 통하여 가장 우리에게 밀접한 감정을 찾을 양으로 신라나 고려 때의 예술을 친(親)한다는 것은 퍽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제일 가까운 거리는 역시 조선에 있다”는 근원 김용준의 혜안을 거쳐, “소수인에 의하여 지은 문명은 귀족 문명이요, 다수인에 의하여 지은 문명은 민중 문명이다. 전자의 특징이 이상적인 데 있다면, 후자의 특징은 실제적인 데 있다. 이는 벌써 이조 문명이 신라, 고려보다 실용적 색채르 짙게 띠고 있는 만큼 미래의 민중 문명을 암시 혹은 배태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호아므이 지적을 포함하여, 국학의 종장들의 선구적 추구를 이후 세대가 어떻게 이어 받아 세계인들과 공유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이 문제는 한국에서 뿐만 아닐 것이다. 일본이 먼저 공업화 되어 거기에 따른 폐단이 있을 것이고 중국도 불원간에 같은 경우를 당할 것이다. 이에 대처할 학자의 자세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앞으로 실학의 방향은 어느 쪽으로 가야하는 것인가”라는 절박한 문제 제기를 했던 벽사에게도 진지한 대답이 되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개념의 민화는 국경 관념을 토대로 한 국가 간 경쟁이나 이권을 초월하여, 환경 문제나 부의 편중 문제 등 국적을 초월한 위협 속에 동일하게 노출되어 있는 인류의 고민들을 아우르는 지성의 매개로서 작용하며, 한국 역사의 긍정적 전통을 전승함과 동시에 세계 사회에서의 보편성을 획득하게 됨으로서, ‘한국화’라는 특정 지역성을 탈피하는 ‘회화’로서 주체적으로 존재 가능해지는 것이다. 부디 ‘한국화라는 딱지’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떼어주기를 바라며, 그 이후라면 ‘회화라는 딱지’를 새롭게 붙이든 온몸에 도배를 하든 아예 속살에다 큼지막하게 ‘이것이 회화다!’라고 문신으로 새기든, 외부인으로서 이러쿵저러쿵 개입할 명분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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