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 하다
‘色을 말하다’ (김지희-엄태림-윤은정-이하)

<25시>의 저자로 알려진 루마니아의 작가 게오르규(Gheorghiu, Constantin- Virgil, 1916~1992)는 예술인의 사명을 `잠수함속의 토끼`로 천명한 바 있다. 잠수함 속의 공기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토끼와 같이, 현실의 문제를 기민하게 포착하고 당위적 경각심을 반영해야하는 것이 예술인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조형언어로 표현된 작품이라 하더라도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사색이 반영되기 마련이며, 사회를 바라보고 숙고하는 사색성(思索性)은 범인이 아닌 화가로 태어난 이들의 숙명이기도 하다.

가가갤러리 기획전 『사색 하다-색을 말하다』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네명의 작가(김지희-엄태림-윤은정-이하)는 독특한 화법과 뚜렷한 개성으로 화단에 자신의 영역을 꾸준히 개척해온 작가들이다. 동양과 서양, 팝아트와 리얼리즘 등 기법과 재료를 넘나드는 장르적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대상을 바라보는 사색(思索)을 통하여 뚜렷한 사색(四色)을 구축해온 공통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 전시를 아우르는 주된 화제인 사색은 상념으로서의 사색이자, 색으로서의 사색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동양화 재료를 사용한 팝아트적인 화면을 선보여온 김지희는 가면으로 통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강박적 웃음을 통해 드러낸다. 상식을 지배하는 `웃는 얼굴`은 진실이라 말했던 표면의 모순성을 일깨우며 팝아트적인 밝은 화면과 이질적인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칼 융이 페르소나(persona)를 사회적 관계를 맺고 인정받기위해 써야하는 가면으로 언급했듯, 외적 가치를 위해 쓴 가면과 자신이 일치된다고 착각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일 꾸민 껍데기에 밀려 고독에 빠지게 되는 일이 허다하다. 김지희의 화면은 이러한 모순된 웃음을 통해서 바라본 현대인의 고독한 자화상을 의미한다.

엄태림은 과거와 미래, 현실을 지배하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화면에 평면적으로 배치한다. `상징적 종합 팝아트`라 지칭하는 작가의 표현처럼, 신화와 스타, 역사 등 다양한 소재를 넘나드는 표현은 화면에 씨줄 날줄처럼 교직되어 작가만의 이미지를 구축해낸다. 그런가하면 윤은정 작가의 화면은 전통적인 리얼리즘을 토대로 대상의 이미지를 포착해낸다. 화면을 부유하는 과일의 형상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착각을 일으키며,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날카롭게 묻는다. 금방이라도 물기가 묻어날 것처럼 완성도 높은 과일의 형상은 오히려 차가운 표정으로 현실을 응시하는 것이다.

볼록한 질감으로 경쾌한 화면을 풀어내는 이하는 작가의 개인적 경험에 기반을 두고 강력한 메시지를 담아낸다. 군대시절, 막역했던 동료가 수류탄에 맞아 유명을 달리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던 충격적인 경험은 작가로 하여금 반전과 평화의 의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작가는 포근한 질감의 밝은 화면 속에 인간과 동물, 역사의 지위의 경계가 허물어진 평화의 세계를 설계하며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다.

뚜렷한 비유와 알레고리, 동시대의 문제의식을 기조로 화단에 자신만의 색을 물들여온 네 명의 작가들. 서로 다른 조형언어로 기민하게 현실의 문제를 포착한 네명의 작가의 사색(思索)은 각기 다른 사색(四色)의 향연으로 하여금 진부한 일상의 의미를 환기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