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ARTS

작가

작가 인터뷰

김정향
환상목욕탕 기행
2009.10.13

인터뷰 날짜 : 2009.07.03
인터뷰어 : 최희경
글 작성자 : 나비

살다 보면 친구한테도 가족한테도 다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설령 이야기 한다 하더라도 ‘혹시 와전되지 않을까’, ‘새 나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먼저 앞서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보다 부정적인 이야기에 귀가 더 쫑긋하니까. 서로 헐뜯기 바쁜 세상인지라 우리는 늘 상처 받고 상처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만의 위안처를 찾으려고 노력을 하지만 언제나 외롭다. 아옹다옹 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세상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온전하게 나를 보여주고 남의 눈치 보지 않는, 그런 공간 어디 없을까. 이런 복잡한 생각들로 머리가 아픈 와중에 피로는 왜이리 쌓여만 가는지… 아, 답답한 이 세상, 환상목욕탕으로나 떠나 볼까.

김정향 바리메디온의 환상목욕탕 #11 161 x 130cm 장지에 채색 2008

- 환상목욕탕으로 떠나는 여행 안내서 -

#1. 환상목욕탕이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 언제라도 드나들기 쉬운 곳, 물을 끼얹고 때를 밀면서 누구나 하나가 되는 곳, 답답한 현실 속에서 조금이나마 정신적인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환상목욕탕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소통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이기에 ‘정화’와 ‘집회’의 장소로도 유명한 환상목욕탕에는 다양한 형태의 물과 수증기, 구름들, 그리고 물과 관련된 물고기, 해태, 용들이 살고 있다고 전해진다. 화가 김정향도 힘들 때마다 떠나는 곳이라 하여 더욱 유명해진 이 목욕탕(현재 그녀는 이곳을 여행한 이후 그림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은 사람들의 갈등과 상처들이 해소되고, 좀 더 나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다리역할을 해주는 신화적이면서도 종교적인 공간이다. 현실계의 문제들이 사라지고 평온함이 존재하는 유토피아라면, 유토피아일 수 있는 그런 곳!

#2. 이것만은 꼭!
이미 최적의 여행코스로 각광받고 있는 ‘외로운 마음의 호수’, ‘눈물의 숲’, ‘귀의 숲’을 방문해 보는 것도 좋겠지만 환상목욕탕에 갔다면 ‘바리메디온’을 꼭 만나야 한다. 바리메디온. 물을 뿌려 모두를 이롭게 하고 치유를 도와준다는 존재로 그 어원은 물 뿌릴 발(潑), 이로울 리(利)에 중간자를 뜻하는 ‘medio’에서 찾을 수 있다. 목욕탕에 갔으니 물과 연관된 사람 한 명쯤은 만나고 와야 하지 않겠는가. 바리메디온은 누구나 한 번쯤 다 보았을 법한 아줌마 같은 편한 몸매에 빠글빠글한 파마머리를 하고 있다. 이야기도 침착하게 잘 들어주면서 엄마처럼 따뜻하게 안아 줄 것이니 바리메디온을 꼭 만나서 힘든 세상사 훌훌 털어버리고 오자.

#3. 무엇을 준비할까?
중국의 고전 ‘산해경’이나 단테의 ‘신곡’을 준비하여 읽으면서 가다보면 입구까지 가는 지루함을 달래 줄 것이다. `산해경`과 `신곡`은 김정향이 환상목욕탕으로 떠날 당시 참고한 서적들로 ‘산해경’에 등장하는 상상의 존재들에게서 많은 영감을 얻었으며, 지옥에서 연옥을 거쳐 천국까지 가는 ‘신곡’의 과정은 환상목욕탕의 기행과정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김정향의 ‘텍스트 북’만큼 도움을 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환상목욕탕에서의 인상과 느낌을 그리던 그녀가 목욕탕에 관한 그림을 구성하는데 시간이 말이 걸려서 일단 당시의 생각들을 글로 적어 두면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작업이다. 이제는 환상목욕탕으로 떠나는 자들에게 필독서가 되어 버린 이 텍스트 북은 여행에 필요한 모든 준비사항들을 포함한 자세한 정보가 담겨 있으니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참! 목욕탕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버린 이태리 타올, 일명 녹색 때수건을 준비하는 것도 잊지 말라.)

#4. 언제, 어떻게 갈까?
밤에 떠나는 것이 제격이다. ‘밤마다의 여행지’를 즐겨 듣는 자들이라면 익히 알겠지만 환상목욕탕은 안개가 자욱히 깔린 어스름한 날 여행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한다. 가는 방법은 불안한 심리, 우울함의 정도, 현재의 고민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5. 알고 떠나면 더 재미있는 목욕탕 이야기
목욕탕, 그것도 공중목욕탕이라는 것은 외국에는 흔하지 않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혹은 찜질방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대체되었지만) 아닌 굴뚝에 무슨 탕, 무슨 탕이라는 단순한 이름으로 동네마다 반드시 있었던 공중 목욕탕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아련한 향수를 자극한다. 생각해보면 뜨거운 목욕탕에서 옷을 다 벗은 채 때를 민다는 것은 창피한 일인 것 같은데 사람들은 이곳에서 아무렇지도 않아 한다. 심지어 모르는 사람한테 등 밀어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자라온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일이지만 이방인의 시선으로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면 굉장히 웃긴 이야기이자 낯설은 풍경이 되지 않을까?
목욕탕은 단순히 목욕만 하는 공간이 아니다. 목욕탕에 온 아줌마들을 생각해 보라. 이미 옷은 다 벗었을 뿐 더러 음료수 한 잔씩 하면서 누구네는 요즘 어떻다는 둥, 동네 어디가 새로 생겼다는 둥 이 얘기, 저 얘기 별별 이야기들을 다 한다. 한마디로 목욕탕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곳이다. 게다가 옷이나 가방으로 타인을 평가하거나 자신이 평가받는 그런 곳이 아니라 모든 걸 다 벗고 정말 알몸 그 자체로, 오직 ‘나’ 자체로만 소통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어쩌면 목욕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솔한 ‘소통’을 하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어디 생각이나 해보았는가? 목욕탕이 이렇게 중요한 공간이라는 것을.

바리메디온의 환상목욕탕 #9 65 x 81cm 장지에 채색 2008

김정향은 지금 ‘환상목욕탕’을 어떻게 더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 한참 고민하고 있다. 다양한 이야기를 하면서 각자 다른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그림 안에 넣고 싶은데 지금 작업에서는 사람들 표정도 다 비슷해 보이고 목욕하는 행위에만 집중되 있는 것 같기 때문이란다. 앞으로는 ‘환상목욕탕’ 그림만 봐도 아 세상에 정말 다양한 부류, 여러 개체가 모여 살고 있구나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연령, 생김새, 갖가지 행위… 그림 안에 담겨 있을 무수한 우리의 모습이 기대된다. 그래서 응원하기로 했다. 이런 거, 저런 거, 온갖 세상만사 모두를 환상목욕탕 안에 담고 싶은 그녀의 욕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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