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ARTS

작가

작가 인터뷰

이채영
그것은 어둠이었고 동시에 빛이었다
2009.10.04

인터뷰 날짜 : 2009.06.12
인터뷰어 : 나비
글 작성자 : 나비

“빛이 사라지면 너에게 갈게”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이 대사를 동시에 말했다. 빛이 사라지면 너에게 갈게. 어린 뱀파이어의 이야기를 그린 스웨덴 영화 ‘렛미인(Let me in)’은 은근한 잔인함 속에서도 감성을 자극하는 영화다. 빛이 사라져야만 너에게 갈 수 있듯이 뱀파이어에게 밤의 세계와 낮의 세계는 천지 차이다. 그래서인지 영상을 통한 어둠 속의 밤 풍경은 적막하다 못해 아련하기까지 하다. 밤 풍경을 그리는 이채영, 그녀 역시 이 영화의 매력에 빠져 들었는지 벌써 2번이 나 보았다고 한다. 영화에서처럼 그녀의 밤은, 부재하지만 그로 인해서 더욱 존재하는 듯한 일상의 풍경들이다. 그렇다면 그 녀는, 어찌하여 이토록 ‘밤’을 고집하는 것일까?

새벽1시_97x130cm_장지에 먹, 채색_2009

사실 그녀가 처음부터 의도하고 밤풍경을 그렸던 것은 아니다. 밤 풍경을 그리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도 있었다. 지금의 작품 을 보고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지만 다양한 채색작업도 했었고, 인물들도 많이 그렸다. 열심히 그리다가도 인물이 있는 부분에서는 손이 느려지는 자신을 깨닫고 ‘인물’을 빼고 ‘풍경’을 그려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나중에 몇 개를 그리고 나서 정신 을 차리고 보니 무언가를 그리긴 했는데 그것들 모두가 ‘밤’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밤에는 빛이 스며들어 있었다. 평소 밤을 좋아하는 그녀가 느꼈던 빛과 어둠의 매력들이 자연스럽게 밤 풍경으로 흘러 들었던 것 같다. 항상 지나가는 그 거리가 밤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낮’의 시선과 ‘밤’의 시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녀도 그랬다. 집으 로 들어가는 그 길은 자주 부딪히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밤이 되면 낯선 공간이 된다고. 분명히 없었던 것 같은 가게들도 보 이고 주변의 것들이 평소와는 다르게 다가온다고. 그래서 무엇인가를 더 보게 되고, 더 찾게 된다고. 그래서 더욱 궁금해졌다. 그녀의 밤, 그녀의 집 앞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이에 대한 답은 그녀의 자랑스러운(?) 에피소드 가 모든 것을 말해 준다. 어느 날 밤, 후배와 함께 집으로 걸어 가던 그 길에 그 후배가 깜짝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는데… “언니, 정말 언니의 그림 속을 걷고 있는 것 같아요!” 그녀의 작품은 누구나 한 번쯤 보았을 그러한 골목 풍경이다. 가보진 않았더라도 한 번쯤은 어디에선가 본 듯한, 마치 우리 동 네인 것 같기도 한, 그런 보편적인 골목 말이다. 이 골목도 들어가보고, 저 골목도 들어가 보면서 골목의 매력에 빠진 그녀는 수유리를 시작으로 평창동, 압구정동 등 성격이 다른 여러 곳을 많이 돌아다녔다고 한다. 동네마다 모두 느낌이 다를 법도 한 데, 각각의 골목들은 하나같이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이 있다. 이러한 ‘보통’의 느낌들이 오히려 신기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 골목, 골목마다 지니고 있는 특별함들은 시간으로 이어졌다. 새벽 1시, 새벽 2시… 그녀의 모든 작품에는 시간이 들어있다. 시간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낮과 밤을 구분하는 1차적이면 서도 가장 근본적인 수단이다. ‘낮’에는 느낄 수 없는 오직 ‘밤’만이 갖고 있는 적막하면서도 강한 느낌을 제목으로도 나타내 고 싶었다고 하지만 그리는 것보다 제목 짓는 것이 더 어려웠는지 그녀는 제목에 얽힌 사연들도 하나, 하나 풀어 놓았다. 사 실 각각의 작품마다 심오한 내용이 담긴 부제들이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 ‘무엇이 그토록 나를 흔들리게 하는가’, ‘어떤 환 영’ 등등… 시간으로만 정한다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사람들이 모르지 않을까 해서 부제를 붙였지만, 그녀가 염려했 던 부분은 이렇다. 그로 인해 오히려 사람들이 그것 하나에만 초점을 맞춰서 보려고 한다는 것. 그렇게 한 가지로 국한되는 게 싫었고 처음 의도했던 것은 그게 아니었기에 그것 조차 다 말이 필요없겠구나라는 생각으로 부제를 모두 없앴다. 대신 그 림에 담겨있는 시간으로 작품을 보게 되면 누구나 그 시간대에 갖는 이미지와 저마다의 ‘특별한’ 이야기들이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제 이쯤에서 ‘먹’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빛과 어둠의 색, 흑백. 오직 ‘먹’만 사용해서 100% 완성도 있는 흑백의 풍경을 그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게다. 붓질 한 번 잘못하여 행여라도 밝은 부분에 튀는 날 에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지만, 수정하기 힘든 먹의 특성상 한 번 실수 할 때 마다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 고 그녀는 자신과 먹이 너무나 잘 맞는다고 한다. 심지어는 이 밤의 풍경들과 골목들이 자신을 들었다, 놨다 하지만 그것이 오 히려 먹의 매력이란다. 그만큼 소중히 다루어야 하는 조심스러운 작업들이기에 더욱 빠져들었고, 그 안에서 조금씩 발전하는 것을 느끼면서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해봐야겠다는 작은 욕심이 생겼다고. 이러한 욕심은 첫 번째 개인전 ‘서울의 밤’에서 드러났다. 첫 번째 개인전, 그 설렘은 그녀가 오랫동안 꿈꿔 왔던 것이기도 하 다. 추운 겨울날이면 어김없이 작업실에 난로를 떼는데 난로 빛에 그림을 말리던 어느 날, 그 빛이 마치 조명 같아서 느낌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 훗날 이러한 느낌으로 조명이 비춰지는 공간을 상상했었는데 막상 전시를 해보니 그 겨울날의 그 느낌 이 나는 것 같다며 밝게 웃는다. 그녀가 원하던 대로 그녀의 ‘밤’들은 이렇게 처음 빛을 보게 되었다.

새벽1시_194x95cm_장지에 먹, 혼합재료_2009

극과 극이라 공존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빛과 어둠은 그녀의 작품 안에서는 오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것은 어둠이었고 동시 에 빛이었다. 빛나는 어둠, 이것이 바로 앞으로 펼쳐질 그녀의 밤, 그녀의 미술을 더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다. “미술은 그냥 ‘삶’이에요. 그냥 그렇게 있어 왔기 때문에 한 번도 이것을 없애야지 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 안에 여러 가지 고충도 많지만 그것 자체가 다 ‘삶’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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