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피 뿐만이겠는가, 우리가 빨아 먹은 것이. 불멸을 꿈꾸는 인간에게 남은 것이라곤 파멸뿐이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커다란 모순이었다. 개봉 전부터 떠들썩 했던 박찬욱 감독의 ‘박쥐’는 불편한 영화다. 극장 문을 나서면서부터,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박쥐’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미지들이 기억을 쫓아다니는 영화,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생각을 곱씹게 하는 영화. 그런 의미에서 ‘종교의 가장 큰 유혹은 불멸’이라고 말하는 이정헌의 작품 역시 쉽게 잊혀지지가 않는다.

박제(剝製)된 Minotauros 25x28x33cm 조형백자토, 유약, 철 2008
그의 첫 번째 개인전 <모(矛)와 순(盾) 이야기-미노타우로스의 誕生>은 말 그대로 세상의 모순에 관한 이야기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종교’의 모순이다. 그는 민족, 국가, 종교라는 이 거대한 이데올로기들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안의 원인이라고 여긴다. 그 중에서도 종교가 가장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상화된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모순이 존재하는 종교를 비판한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인간의 ‘믿음’ 그 자체를 공격하는 것은 아니라 믿음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비판을 한다는 것이다. 종교에 관한 것은 곧 ‘신’에 대한 것이고, ‘절대자’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그 스스로도 작업을 하면서 많이 고민 했다고 한다. 종교에 관한 여러 가지 담론들을 건드리고 있지만 어쩌면 그에게 종교는 가장 큰 징크스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제일 방해하는 것일 수도 있는.
두 번째 개인전 <슬프지 않은 광대 이야기-피노키오 나라의 미노타우로스 섬>은 ‘종교’와 ‘과학’이라는 대립적인 요소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종교와 마찬가지로 과학도 불멸을 꿈꾼다. 더욱이 현대사회의 불멸(특히 의학적인 부분에서)은 과학의 힘으로 이루지고 있다.
이것을 피노키오 이야기로 예를 든다면 너무 끼워 맞추는 격 일까? 피노키오는 사이보그의 원형격인 이야기로 사람에 의해 자동인형으로 만들어진 이후 완전한 생물이 된다. 인형이 인간이 되면서 ‘복제’라는 일종의 허구는 현실이 된다. 시뮬라크르가 완벽해지는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피노키오는 진화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오늘날의 로봇이나 다름 없다. 이미 많은 영화들에서 시도했던 것처럼, 로봇에게도 감정이 생기는 날이 오게 되지 않을까?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인공적으로 발전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과학과는 달리 종교는 정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과학은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종교는, 없다. 종교는 오직 무조건적인 믿음에서 기인할 뿐이다. 이 무조건적인 믿음은 종종 오도된 신앙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것은 ‘제페토’를 박제 시키는 ‘광대’ 이야기에서 보다 심화 된다. 사람들이 늘상 말하는 ‘광대’는 자신의 의지가 없는 약한 존재이지만 이정헌이 말하는 ‘광대’는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모든 것을 뛰어넘어 공연을 한다는 점에서 ‘초월자’적인 입장에 있다. 그러나 광대인 피노키오가 그의 창조자인 제패토를 박제시킴으로써 초월자의 역할은 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기적인 본능 때문에 창조자를 박제시키는 그 행위 자체가 스스로를 박제시키는 것이기도 한, 이중적인 의미가 작용한다. 결국 종교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면서도 그 안에서 끊임없는 모순을 만들어 내고 또 그 안에 갇히게 되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세 번째 개인전 <섬: 그 거리 Great Minotauros>로 오면서 개인이나 집단의 관계에서 한쪽으로만 치우쳤던 예전 작업과는 달리 ‘관계’와 ‘소통’이 중요해졌다. 섬은 독립된 주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고립된 주체이기도 하다. 그가 말하는 섬은, 섬 하나 하나가 징검다리로 이어져 있기에 그 징검다리 하나가 빠지면 존재 자체가 없어지게 된다. 인간이 곧 하나의 섬이 되어 거대한 바다 위를 표류하고 있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 인간과 인간사이의 거리를 좁혀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징검다리의 역할이 아닐까.
그의 작품에는 신화에서 모티브를 차용한 ‘미노타우로스’가 항상 등장한다. 머리는 황소, 몸은 사람인, 그러나 인간도 아니며, 짐승도 아닌 이 이질적인 생명체는 줄곧 괴물로 형상화 되어 왔다. 괴물도 괴물 나름이겠지만 미노타우로스야 말로 서글픈 괴물이다. 주술적으로는 신과 짐승 사이에서 이종교배로 태어난 존재로 희생물을 먹어 치우지만 어쩌면 그 자체가 희생자이기도 한. 괴물입장에서는 생존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현실인 셈이다. 이성과 본능, 실재와 이상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
도 미노타우로스와 별반 다를 바 없게 느껴진다.

Mommy. Mummy! Mommy!! 123x43x93cm 조합토, 산화물 2002
그의 작업과 전시는 하나의 독립적인 이야기들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그 안에서 각각 독특한 이미지들로 뻗어 나갔다. 지금까지 해왔던 작업들을 토대로 다음 작품들 역시 이정헌만의 시각이 담긴 스토리로 발전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 그가 현재 바라는 것은 작품 자체의 퀄리티가 세 단계 정도 뛰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굳이 숫자로 따지자면 10단계 중에 지금은 5단계 정도 되는 것 같다면서. 아마 세 단계 정도 뛰는 것이 확실히 ‘이정헌’만의 것이 되는 것이리라. 그의 작품에는 괴기스러운 아름다움이 있다. 아직 우리에게는 생소한 아름다움일지 몰라도 이것이 그의 작품을 더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특별함이 살아있는 한, 다음에 만났을 때 그의 성장 그래프는 분명 ‘8’이 되어 있을 것이다.
“공예는 각기 고유한 틀이 있고 기술적인 면에서 배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그 선까지 들어가기가 참 힘들어요. 표현 자체가 힘들고, 결과물도 안 나오고. 그런데 알게 모르게 그 기술에 계속 빠져 들어요. 물론 외적인 것들에 대해서 계속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요. 작품이 가마 안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불에 들어가야 된다는 압박이 크기도 해요. 예전에는 크기도 제한 안 받고, 가마도 생각 안하고, 도자 개념으로 하지 않고 막 만들었어요. 그런데 계속 작업을 하면서
어느 순간 안전한 것, 불에 들어갈 수 있는 것만 생각하면서 갇히게 되더라고요. 미술하는 사람들도 그런 것 같아요. 현실과 타협은 봐야 될 것 같은데 견딜 수 있을 만큼은 자유롭게 작업하고 그러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