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ARTS
  • 인터뷰 날짜 : 2008.02.25
  • 인터뷰어 : 최희경
  • 글 작성자 : 나비
  • 본명 이유나. 하지만 작가로서 그녀는 ‘유난’이다. 유난. 작품활동을 시작하면서 그녀가 만든 작가명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 이름을 정할 수 없다. 개명을 하지 않는 한 부모님이 정해준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간다. 이유나가 자신의 본명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부수적인 배경들을 뒤로 하고 작가로서 작품에 몰입하기 위해 ‘유난’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한마디로 오직 작품으로만 평가 받고 싶은 예술가의 자존심이다. 이유나가 아닌 유난으로. 현재 그녀는 스튜디오 유닛
    운영진으로도 활동하면서(스튜디오 유닛은 젊은 작가들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비영리 단체이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홍보하며, 사이버전시회 및 옥션을 진행하고 있다.) ‘초잠식지’ 시리즈로 열심히 작업하고 있는,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예술가이다.




    초잠식지- Coral  160 x 20cm  천, 녹물, 먹, 아크릴  2008

    “나에게 있어서 빨강은 늘 경이로움이다. 감탄의 색이며 환희의 색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우리나라에 소개 된 터키작가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이 생각난다. 그녀가 유독 빨간색을 좋아해서 제목이 연상 된 점도 있지만 전체적인 소설의 분위기와 그녀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닮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캔버스에서 펼쳐지는 화면구성과 강렬한 색상들은 추리소설 형식의 다양한 전개, 예술가적 고뇌, 신비로운 분위기를 담고 있는 파묵의 작품과 오묘하게 겹쳐 보였다. 특히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
    고 심장은 벌써 멈춰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라고 시작하는 첫 대목에서부터 그랬다. 왠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을 듯한 ‘나’의 모습을 상상해서 그런 걸까? 피의 붉은 빛을 좋아한다는 그녀가, 그리고 그녀의 작품이 꼭 그런 모습이었다. 남들은 잔인하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그녀는 피의 맑은 빨강 빛을 좋아한다. 몸에서 나오는 유일한 색인 피를, 그저 알 수 없이 좋아한다. 그래서 그녀는 작품에 붉은 색을 사용했을 때의 그 에너지와 환상적인 느낌을 좋아한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지만 빨강색은 그 자체만으로 강렬한 흡인력을 가진 매력있는 색인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유난히 빨간색을 좋아하는 유난. 그녀는 정말이지 이름만큼이나 유난하다.그녀의 작품은 꿈과 현실,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든다. 그녀가 표현하고자 하는 작업의 주된 방향은 ‘컬러가 있는 꿈속의 무의식’에 관한 것이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무의식의 세계가 캔버스에서도 펼쳐진다. 꿈의 해석은 길고, 아름답고, 복잡하고, 정말 사실 같은 꿈으로 가득 차있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꿈일지라도 모든 꿈은 하나의 이야기 속에 뒤범벅된 구체적인 시각적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그 의미를 위장한다.

    “꿈이 전달되려면 조리 있는 말로 정리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의식의 검열을 받게 되므로 무의식의 상태는 고스란히 전해 질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무의식으로 만들어진 꿈들을 이야기로 표현하지 않고, 그림을 통하여 그 속에 잠재 되어 있는 것을 풀어내려고 한다. 무의식의 검열을 받지 않도록 그림 그리는 행위부터 다르게 시작되어야 한다. 그렇게 또 다른 무의식으로 행해지면서 작업을 시작한다. 색의 선택 그리고 기법은 중요하지만 나는 형태에 집착하지 않는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선에서 새로운 형태가 만들어지길 원하기 때문이다.”

    늘 꿈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어 했던 보르헤스는 ‘잠’과 ‘깸’ 사이의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그 순간, 그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는 어떤 꿈이었을까? 꿈 같은 이야기를 쓰는 것만큼 꿈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그녀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초잠식지라는 새로운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초잠식지  50 x 50cm  천, 녹물, 먹, 아크릴  2005

    초잠식지: 불안이 조금씩 침노하여 내 영혼을 먹어 들어감

    그녀의 작품은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감정, ‘불안’의 산물이다. ‘불안’이 색이라면 ‘잠식’은 녹물이다. 잠식된 불안이 천을 통해 스며든다. 그녀는 녹물을 부식시켜 가라앉은 앙금을 먹에 섞어서 구김이 있는 천에 작업함으로써 자연적으로 발생한 형태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와 방법을 통해 잠재되어 있던 의식은 형태를 만들어 간다. 비형태적인 것들이 형태를 찾아가는 길이다.

    사람마다 누구나 ‘불안’이라는 감정을 다양한 형태로 갖고 있다. 이 ‘불안’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라서 치유되는 방법도 모두 다르겠지만, 서서히 잠식된 불안에도 삶의 형태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녀 스스로 찾아가고 있듯이. 그것은 빨강일 수 도 있고, 또 다른 색일 수도 있다. 사람이 아프면 병원에 가듯이 그녀는 아프면 그림을 그린다. 그녀에게 그림이란 ‘불안함을 표현함으로써 나를 치유해 주는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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